“여기(미국) 언론에 따르면 북한의 핵 위협이 갈수록 증가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 뉴스가 연일 쏟아지고 있다. 미국의 선제공격 가능성도 여전히 심심찮게 들린다. 잘 지내고 있나. 한국에 있는 당신이 정말로 걱정이 된다.”
나흘 전 미국인 친구로부터 받은 이메일이다. 2009년 미국 연수 당시 옆집에 살았던 인연으로 간혹 이 친구와 이메일을 주고받는다.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한반도 뉴스를 현지에서 얼마나 많이 접했는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안부를 묻는 이메일을 보냈겠나 싶다. 2009년 5월 25일 북한이 2차 핵실험을 강행했을 당시, 연수 기간이 끝나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나를 한사코 말렸던 친구다. “전쟁이 일어날 수 있으니 계속 있으면 안 되냐”며 말이다. 씁쓸했던 그때 일이 생생하다.
고비는 넘겼다고 하나 8년 전처럼 한반도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 북한 핵·미사일에 대한 전략적 평가가 달라지면서 미국과 중국의 대북 공조 압박은 예전과 달리 강력해졌다. 미·중 틈에서 우리만 따돌림 당하는 ‘코리아 패싱’도 우려된다.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발언까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외신 인터뷰를 통해 전해졌다. 주변 강대국에 끼인 우리 현실에 대한 비애를 새삼 느낀다.
사드 배치까지 맞물려 대외적인 환경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하지만 내부의 긴장감은 외부와 큰 차이가 있는 듯하다. 이메일을 보낸 미국인 친구처럼 밖에선 군사적 충돌을 염려하고 있지만 안에선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린다. 한반도 주변 정세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요동치고 있는데 대선 후보들의 행보는 믿음직하지 못하다. 차기 대통령이 직면해야 할 엄혹한 현실이 쌓여만 가고 있지만 후보들은 이렇다 할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TV 토론회 같은 데서 치열하게 논쟁을 벌여야 할 점도 이런 문제들이다. 압박과 대화 등 미국의 기류가 변화무쌍하지만 후보들의 눈은 과거에만 머물러 있다. 위기를 돌파할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후보들에게 과연 나라를 맡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이러니 TV 토론 횟수가 거듭할수록 “찍을 후보가 없다”는 한숨만 더 늘어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투표일이 다가올수록 마음을 못 정한 유권자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는 여론조사도 있다. ‘찍을 ×이 없으니 투표용지에 0번을 만들자’ ‘후보들이 못 미더우니 유권자라도 정신 차리자’라는 네티즌들의 경고성 의견도 나온다.
지난 2008년 개봉한 영화 ‘스윙 보트(Swing Vote)’를 최근 다시 봤다. “투표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정치 혐오로 가득했던 버드(케빈 코스트너)는 자신이 가진 한 표의 엄청난 무게를 뒤늦게 깨닫고 대통령 후보 검증에 직접 나선다. 그의 초등학생 딸 몰리(매들린 캐럴)는 셀프검증을 통한 투표가 왜 중요한지 이렇게 말한다. “세계의 모든 위대한 문명은 같은 길을 따라 왔습니다. 속박에서 자유로, 자유에서 번영으로, 번영에서 만족으로, 만족에서 무관심으로, 무관심에서 다시 속박으로, 우리가 이런 역사에서 벗어나려면 순환 고리를 깨야 합니다.” 투표는 삶을 바꾸고 나아가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영화 속 얘기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프랑스의 정치철학자인 알렉시 드 토크빌은 “모든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고 했다. 투표일은 다가오는데 이래저래 고민이 많아지고 있는 유권자들이 아프게 새기고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대목이다. 대선까지 11일 남았다. 유권자한테도 후보한테도 이제 시간이 별로 없다. 구겨진 후보 공보물부터 다시 펴봐야겠다.
김준동 논설위원 jdkim@kmib.co.kr
[여의춘추-김준동] 찍을 만한 후보가 없다고요?
입력 2017-04-27 1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