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프랑스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대형 폭발사건이 발생했다. 새벽시간 누군가 고의로 설치한 다이너마이트가 터졌고 아파트가 크게 부서졌다. 사고가 아닌 ‘테러’로는 2차대전 이후 파리에서 발생한 가장 큰 폭발이었다. 프랑스 극우당 국민전선(FN)의 장 마리 르펜(89) 대표를 노린 테러였다. 다행히 그와 가족은 변을 당하지 않았다. 그의 막내딸 마린 르펜(48)은 당시 8세였다. 르펜은 이 사건을 통해 아버지가 세상 사람들한테 얼마나 미움을 받고 있는지 깨달았다고 한다.
아버지 르펜이 국민전선을 만든 건 72년이다. 프랑스 우선주의를 주창했고 이민자 유입 제한, 보호무역주의를 주요 정책으로 내걸었다. 그때 프랑스에서는 이민자 때문에 실업이 증가하고 범죄율이 증가한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불만도 톨레랑스(관용)의 벽을 넘지 못했다. 73년 총선에서 국민전선은 단 0.5%를 얻었다. 이듬해 대선에서 아버지 르펜은 0.8%를 얻어 망신을 당했다. 하지만 이민자들을 향한 독설은 더욱 거칠어졌고 결국 폭탄 테러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렇게 미움 받던 국민전선이 다음달 7일 프랑스 대선의 결선 투표에 자당 후보를 진출시켰다. 딸 르펜은 지난 23일 1차 투표에서 국민전선 후보로선 역대 최대인 21.3%를 득표했다. 아버지가 첫 도전에서 0.8%를 얻은 지 43년 만에 딸이 20%대 득표에 성공한 것이다.
국민전선의 이념 노선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온갖 수모와 테러 위협 속에서도 40년 넘게 소수당을 끌고 온 그 끈질김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게다가 당명 한 번 바꾸지 않았다. 끊임없는 이합집산과 창당, 폐당, 탈당, 복당, 연대가 이뤄지는 한국식 ‘날림 정당문화’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딸 르펜의 지지층 확대를 위한 노력이 눈부셨다. 르펜은 98년 당 법률고문으로 들어가기 전 변호사로 활동했다. 저소득층을 위한 국선변호사 활동에 열성적이었다. 변호사를 하면서 르펜은 ‘말의 힘’을 키웠다.
사회·공화 양당 체제의 프랑스에서 소수당 출신이 고개를 내밀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 르펜은 TV와 라디오를 파고들었다. TV토론에 적극 참여하고 잦은 라디오 출연을 통해 당의 존재감을 알려나갔다. 토론을 잘해 출연하는 프로그램마다 시청률이 뛰었다.
당의 이미지 개선에도 애를 썼다. 아버지 르펜은 비판자들로부터 ‘악마’로 불렸다. 2011년 아버지에 이어 당대표가 된 르펜은 ‘탈 악마화’를 추구했다. 독설을 내뱉지 않았고 이념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 민감한 유대인이나 나치와 관련된 발언을 삼갔다. 2015년 아버지가 또다시 나치를 옹호하자 ‘야만의 극치’라고 비판하며 출당시켰다. 르펜은 젊은층에도 공을 들여 현재 국민전선은 30대 이하 유권자층에서 가장 인기가 높다.
르펜은 신경질을 부리는 게 마치 극우와 소수당의 상징인 것처럼 만든 아버지와 달리 웃는 표정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되게 했다. 또 다혈질 아버지와 달리 차분한 이미지를 내세웠다. 르펜은 두 번의 이혼 후 현재 세 번째 남성과 사실혼 관계에 있는데, 복잡한 결혼 관계와 힘든 여성 정치인으로서의 삶 속에서도 자녀들을 잘 키워내 ‘당찬 페미니스트’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극우와 페미니스트, 참 안 어울리는 조합 아닌가.
현재의 판세로 볼 때 르펜이 이번 결선 투표에서 이기긴 쉽지 않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행보에 비춰보면 언젠가 그녀가 프랑스의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되는 날도 오리라 본다. 아직은 극우에 치우친 정책 때문에 욕을 먹고 있지만 정치인으로의 끈질김과 확장성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손병호 국제부장 bhson@kmib.co.kr
[데스크시각-손병호] 프랑스 여걸, 르펜의 이면
입력 2017-04-26 17:46 수정 2017-04-26 2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