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보리의 물결이 넘실대는 가파도
가파도는 제주 본섬과 국토 최남단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도 사이에 있다. 제주도의 부속도서 가운데 우도 다음으로 큰 섬으로 면적은 87만4328㎡. 서울 여의도의 3분의1 정도다. 가파도는 키가 가장 작은 섬이다. 높이가 바다와 거의 나란하다. 그나마 뾰족 솟은 가운데가 해발 20.5m에 불과하다. 멀리 바다에서 보면 사나운 파도에 떠다니는 가랑잎 같다.
가파도의 봄은 푸르름으로 파도친다. 이곳의 보리밭은 53만㎡로 섬 면적의 60% 정도를 차지한다. 청보리는 ‘향맥’이라는 제주 향토 품종으로, 전국에서 가장 먼저 길고 푸르게 자라 봄이 되면 푸른 물결이 굽이치는 장관을 연출한다. 수확철인 5월까지 거센 해풍에 일렁이는 보리밭의 푸른 생명을 즐길 수 있다. 해질녘에는 보리의 푸른빛이 황금빛으로 변하면서 바다와 하늘과 뒤섞여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보리밭 사이를 지나 마을 안길과 해안, 밭담을 따라 일주하는 5㎞의 가파도 올레길(10-1코스)도 색다른 묘미를 선사한다. 오르막이 별로 없고 길이도 길지 않아 ‘놀멍 쉬멍’(놀며 쉬며의 제주어) 걷기 딱 좋다. 길을 따라 걷다 허기가 진다면 해녀들이 갓 잡은 해삼, 전복, 성게, 소라, 돌미역 등도 맛볼 수 있다.
상동에 위치한 가파도 선착장에 내려 왼쪽(동쪽)으로 돌면 개엄주리코지가 나온다. 섬 여기저기에 펼쳐져 있는 청보리밭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경관이 좋은 곳이다. 멀리 하늘 높이 풍력발전기의 거대한 풍차가 돌아가고, 가파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작은 골목 골목까지 올레길들이 이어진다.
이어 ‘6개의 산’이란 이정표와 만난다. 제주의 산 7개 가운데 영주산을 제외한 한라산, 산방산 등 6개의 산을 볼 수 있다는 곳이다. 동쪽 끝의 해안가엔 ‘제단집’이 있다. 둥글게 돌담을 쌓고 가운데 작은 돌 두 개를 받친 뒤 위에 평평한 반석을 얹어 제단처럼 만든 형태다. 이 곳을 지나면 멀리 국토의 막내 마라도가 아스라이 보인다.
제주도 내 유인도 가운데 드물게 물이 솟는 가파도에는 사투리로 ‘고망울’이라 불리는 우물이 두 곳에 있다. 풍족한 양은 아니지만, 마실 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최근 개발이 진행되면서 우물은 말라가고 있다.
하동방파제에서 주민들이 물 긷고 빨래하던 ‘동항개물’, 물질 끝낸 해녀들이 곁불을 쬐던 ‘불턱’ 등을 지나 하동포구에서 섬 가운데를 가로지르면 중간지점에 가파초등학교가 있다. 정문 옆에 이 학교의 전신 신유의숙(1921년) 설립자이자 항일운동가 김성숙 선생을 기리기 위한 공원이 정원처럼 조성돼 있다.
오감을 활짝 열고 자연과 대화하며 걷는 올레길
제주도를 상징하는 올레길은 2007년 9월 1코스가 문을 연 이후 갖가지 사연을 안고 짧게는 1박2일, 길게는 한두 달씩 제주에 머물며 올레를 다녀간 이들의 마음을 치유했다. 모녀 간, 부자간, 가족간, 혹은 혼자서 걸어도 좋다. 올레는 마음으로 걷는 길이다.
올레 5코스는 일출봉이 아스라이 보이는 남원포구에서 시작해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쇠소깍까지 이어지는 약 15㎞ 길이다. 5∼6시간이 소요된다. 그 길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 산책로로 꼽히는 큰엉해안경승지가 지난다.
큰엉해안경승지는 검은 용암덩어리의 해안절벽이 장관을 이루는 곳. 때묻지 않은 남국의 해안절경 남원 큰엉이 숨어있다. ‘큰엉’이라는 이름은 바닷가나 절벽 등에 뚫린 바위그늘(큰 언덕)을 일컫는 제주방언이다. 거북이 등짝처럼 쩍쩍 갈라진 검은 용암 덩어리와 하얀 포말을 이루는 바닷물은 찾는 이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큰엉이 있는 곳에서 산책길 정면을 바라보면 좌우 나뭇가지 사이로 마치 한반도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형상을 볼 수 있다. 입소문이 나면서 포토존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곳이다. 한반도 형상 뒤로 보이는 수평선은 휴전선을 연상시킨다.
인근에 ‘쇠 떨어지는 고망(구멍)’이 있다. 방목된 소들이 큰엉 일대 야초지에서 풀을 뜯다가 더위를 피하려고 그늘을 찾아 숲속으로 들어갔다가 그 구멍으로 떨어져 죽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큰엉의 수많은 바위들 중 옆에서 보면 마치 사나운 호랑이가 사냥을 하듯 입을 크게 벌려 있는 모습이 보인다. 호랑이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호두암’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얼핏 보면 매의 구부러진 입모양으로도 보인다. 호두암의 아래쪽에 유두암이 있다.
생태계의 보고, 화순곶자왈
곶자왈에도 숲 사이로 이어진 길이 아름답다. 곶자왈은 나무와 덩굴, 암석 등이 어우러져 생태적으로 안정된 천연림을 일컫는 제주도 말이다. 화산이 폭발하면서 생겨난 현무암 탓에 잡목만 자라고 땅심도 얕아서 농사를 지을 수 없어 곶자왈은 제주사람들에게 땔감이나 조달하고, 말과 소를 방목하며, 노루나 꿩을 사냥하는 곳이었을 뿐이다.
이런 곶자왈이 달라졌다. 화산이 분출하면서 만들어낸 용암의 요철 지형이 지하수 함양과 보온·보습 효과를 일으켜 남방계 식물이 살 수 있는 북방한계선과 북방계식물이 살 수 있는 남방한계선이 공존하는 세계 유일의 독특한 숲을 이룬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서귀포시 안덕면 상창리에 화순곶자왈이 자리한다. 해발 492m인 병악에서 시작해 화순리 방향으로 총 9㎞에 걸쳐 분포한다. 평균 1.5㎞의 폭으로 길게 뻗어 곶자왈로는 드물게 산방산 근처의 해안지역까지 이어진다. 1132번 지방도로에 인접해 있고 비교적 짧은 시간에 둘러볼 수 있어 최근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화순곶자왈 생태탐방 숲길은 1.6㎞의 직선코스(25∼35분 소요)와 2㎞의 기본순환코스(30∼40분 소요)가 있다. 숲길은 자연곶자왈길과 송이산책로, 삼나무데크산책로 등이 잘 정비돼 있다. 때죽나무, 생달나무 등 곶자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생식물과 함께 개가시나무와 더부살이고사리 등 멸종위기 식물도 만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미군의 제주도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이 구축한 진지터도 남아 있다.
여행메모
신분증 지참·배 시간 등 확인 필수
가파도 일주 2시간… 자전거가 ‘딱’
가파도는 제주도 남서쪽 모슬포항에서 5㎞ 정도 떨어져 있고 국토 최남단인 마라도 위쪽에 위치한 섬이다. 모슬포항에서 배로 15∼20분 걸린다. 배편은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50분까지 약 1시간 간격으로 9편이 출발한다. 가파도 선착장에서는 오전 11시25분부터 7편이 운항한다.
요금은 어른 기준 왕복 1만3100원이며 입도료 1000원이 포함돼 있다. 승선객은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해야 한다. 마라도행 매표소와 같은 곳이지만 선착장은 나뉘어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가파도에 들어가기 전에 배 시간과 폭풍주의보 등을 확인하는 게 좋다.
가파도는 상동과 하동, 두 마을로 이뤄졌다. 섬 전체를 걸어서 둘러보려면 2시간 정도는 잡아야 한다. 가파도의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데는 자전거도 좋다. 가파도 선착장 대합실에서 빌려 오전과 오후 반나절을 탈 수 있다.
해질녘과 해뜰녘의 청보리밭을 감상하려면 가파도에서 하룻밤 머물러야 한다. 가파도에서 가장 큰 민박집은 상동포구 인근 가파도 바다별장(064-794-6885). 1박2일을 촬영한 집이다. 이밖에 해녀촌 등 민박과 음식점을 겸한 집이 몇 곳 있다. 가파도에 어둠이 내릴 무렵 저 멀리 모슬포의 희미한 야경을 마음에 담아보는 것도 좋다.
서귀포=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