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축복 대신 군기잡기로 얼룩진 ‘나이팅게일 선서식’

입력 2017-04-24 05:02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전문간호직에 최선을 다할 것을 하나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검은 머리카락을 단정히 쓸어 넘기고 하얀 간호사복을 차려입은 간호대 학생들이 선언문을 읽어 내려간다. 학생들의 손에 든 촛불은 긴장과 기대가 섞인 앳된 얼굴을 비춘다. 간호대 학생들이 거치는 ‘나이팅게일 선서식’의 풍경이다.

나이팅게일 선서식은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한 학생들이 의료 현장에 나가는 실습이나 졸업을 앞두고, 크림전쟁에서 부상자들을 간호한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의 정신을 되새기는 행사다. 간호사로 첫발을 내딛으며 의료인으로서 마음가짐을 다지는 의미다. 하지만 선서식 본래 의미는 퇴색되고 지나친 ‘군기잡기’로 변질됐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올해 간호학과를 졸업한 신모(21·여)씨는 실습에 들어가기 전인 지난해 10월 선서식을 거쳤다. 선배들은 머리카락이 자연 갈색인 신씨에게 “선서식에 참여하려면 (머리카락이) 검은색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선서식까지 세 번이나 검은색으로 염색을 했다. ‘검정색에 가르마 없는 올백머리’를 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이다. 심지어 촛불을 드는 높이와 팔을 벌리고 다리를 내리는 각도까지 똑같이 맞춰야 한다. 조금만 어긋나면 선배들의 매서운 질타에 때론 욕설까지 듣는다.

간호학계에서는 이런 괴롭힘을 ‘태움문화’라고 지칭한다. 들들 볶다 못해 영혼까지 태울 정도로 괴롭힌다는 의미다. 지난해 가을 선서식을 한 나모(22·여)씨는 행사 3주 전부터 한 주에 10시간씩 선서식 연습을 했다. 나씨는 “선배들이 선서식 지도를 빌미로 후배들에게 괜한 화풀이를 하거나 평소 사이가 좋지 않은 후배를 괴롭히기도 했다”며 “오로지 간호사로서 윤리 의식을 다짐하는 선서식을 했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지방소재 대학 간호학과 학생인 최모(27·여)씨는 “낡아서 삐걱대는 의자에 소리 내 앉지 말라고 면박을 주고, 후배의 머리 모양이 선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접 풀어서 다시 묶었다”고 전했다. 그는 “숭고한 행사라기보다는 보여주기 위한 공연이었다”고 덧붙였다.

혹독한 행사 준비는 환자의 생명이 걸린 간호사라는 직업의 특성을 미리 몸에 익히게 하려는 목적이라고 간호사들은 설명하지만, 오히려 간호의 질이 떨어지는 이유가 되고 있다. 지난해 이윤주 인천재능대 간호학과 교수가 간호사 45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10명 중 4명(40.5%)은 긴장과 초조함을 느낀다고 했고, 11.7%는 긴장으로 인해 실수가 늘고, 혼날까봐 두려워 결근을 했다고 답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선서를 가혹하게 하면 간호사로서 취업 이후의 생활에 대한 두려움, 부정적 선입견을 심어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태움문화는 간호사를 비롯한 보건업의 직장문화에도 영향을 준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지난해 10월 ‘국내 15개 산업 분야의 직장 괴롭힘 실태’를 조사한 결과 ‘보건업·사회복지서비스업’은 종사자의 32%가 괴롭힘을 경험했다고 해 1위를 기록했다. 임은희 보건의료노조 부산대병원지부 사무장은 “본인 업무만으로도 바쁜 상황에서 신입까지 가르쳐야 하니 만성 스트레스에 시달릴 수밖에 없고, 괴롭힘 문화로 발현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괴롭힘을 견디지 못해 일을 그만두는 간호사가 늘면 신입이 빈자리를 채운다. 인력 부족이 태움문화를 만들고 다시 인력 이탈을 부르는 악순환이다.

강지연 동아대 간호학과 교수는 “계속 지적받거나 태움을 당하면 아무리 일을 잘하는 간호사도 실수를 반복하게 되고, 이는 환자의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간호사 근무 환경을 개선하고, 병원 차원에서 스트레스 관리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임 사무장은 “국가 정책적으로 간호인력을 충원해야 태움도 개선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글=최예슬 신재희 기자 smarty@kmib.co.kr, 그래픽=이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