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대상에 접근… 한정식 첫 대규모 회고전

입력 2017-04-24 00:00
나무, 1980년대, 젤라틴 실버 프린트. 나무의 결에서 여성의 이미지를 읽어내고 있다(왼쪽 사진). 발, 1980년대, 젤라틴 실버 프린트. 발을 찍은 것이지만 본래의 발의 형상과는 다른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나뭇결에서 언뜻 이탈리아 모딜리아니의 목이 긴 여인상 같은 얼굴이 연상돼 애잔해진다. 클로즈업 한 발뒤꿈치는 어떤 새로운 생물체를 보는 듯 신비감이 든다.

한국 추상사진의 선구자 한정식(80)의 국내 첫 대규모 회고전 ‘한정식-고요’전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사진계에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사실 위주의 다큐멘터리 사진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 풍토에서도 그는 일찌감치 사진 자체의 방법론을 중시하는 형식주의를 받아들여 사진에 한국 고유의 미와 동양 철학을 담아냈다. ‘한국적 형식주의’ 사진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되는 그의 작품 세계는 1980년대 들어 추상사진을 실험하던 ‘나무’ ‘발’ ‘풍경’ 시리즈와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60대 들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는 ‘고요 시리즈’로 나뉘어 선보이고 있다.

그는 나무와 돌, 주변의 풍경과 교감하며 사물의 본래 형태를 벗어난 새로운 풍경을 읽어낸다. 예컨대 나무의 결에서 찾아낸 예수 얼굴, 모딜리아니의 여인 이미지는 형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대상에 접근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작가 인생 후반기를 특징짓는 고요 시리즈는 빗자루가 만들어낸 무늬, 그림자가 만들어낸 원 등에서 동양적인 명상의 여운을 던진다. 대상이 갖고 있는 형태가 아니라 느낌이 먼저 오는 사진, 그리하여 기존 사물이 가진 의미가 아닌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 내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1980년대부터 최근작까지 4개 시리즈 100여점이 나왔다

그는 현재 한국 예술사진사에서 기둥 같은 존재가 됐지만 출발은 좀 특이하다. 그는 서울 태생으로 서울대 사범대학 국어과를 졸업한 뒤 교사로 지냈다. 취미 삼아 사진을 찍다가 1968년 1세대 다큐 사진작가인 홍순태(1934∼2016)가 조직한 아마추어 사진동아리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낭중지추인가. ‘동아사진콘테스트’등 여러 공모전에 당선된 것이 인생의 전기가 됐다.

39세의 나이. 결혼해 아이 셋을 둔 가장이었지만 과감히 안정적인 교사직을 그만두고 늦깎이로 일본 유학을 다녀와 본격적으로 사진작가의 길을 걸었다. 82년부터 2002년까지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한국 최초로 사진학회를 창립하고 학술지를 발간함으로써 보다 전문적인 사진 이론을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8월 6일까지(02-2188-6246).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