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장애 학생 ‘소리없는 재판’… “꿈이 분명해졌어요”

입력 2017-04-21 05:00 수정 2017-04-24 14:41
법복 차림의 서울 농학교 학생들이 장애인의 날인 20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청사에서 모의재판을 하며 수화로 판결문을 읽고 있다.서울고등법원 제공

장애인의 날인 20일 서울 서초동 법원청사 406호 법정. 앳된 얼굴의 고등학생들이 법정에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들은 검사석과 피고인석, 방청석에 제각기 나눠 앉더니 두 손을 바쁘게 움직이며 들뜬 표정을 지었다. 자주색 법복을 입은 이시진(18)양이 판사석에 앉자 아이들 시선이 일제히 법대로 쏠렸다. 이양이 손짓을 시작했다. “지금부터 서울농학교 모의 형사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곁에 앉은 전문 통역인이 이양의 수화(手話)를 마이크로 옮기면서 ‘소리 없는 재판’의 막이 올랐다.

서울고법은 이날 국립서울농학교 재학생 23명을 법원에 초청했다. 청각장애를 겪는 학생들에게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판사는 어떤 일을 하는지 소개하고 서로 소통하겠다는 취지다. 국내 최초 시각장애인 법관인 최영(현 부산지법 근무) 판사가 2012년 5월 11일 첫 재판을 시작했지만, 아직 청각장애인이 법관이 된 사례는 없다.

도우미로 참석한 서울중앙지법 권형관(34·연수원 40기) 판사는 재판 내내 학생들의 열띤 질문 세례를 받았다. 권 판사는 수화통역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유일한 판사다. 검찰 측 발언이 끝난 뒤 판사 역할을 맡은 이양이 “재판을 마치겠다”고 하자, 권 판사는 수화로 “피고인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없는지 물어봐야 한다”고 했다. 이어 “그래도 참 잘했다”고 덧붙이자 이양의 얼굴이 불그레해졌다.

권 판사는 군법무관 시절 수화를 처음 배웠다. 개인적 호기심도 있었지만, 언젠가 법정에서 만나게 될지 모를 농인(聾人)에게 미약하나마 도움이 된다면 재판에 대한 신뢰를 조금은 높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서정원(18)군은 수화로 권 판사에게 “살인죄를 범한 피고인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드느냐”고 물었다. 권 판사는 “형사재판부에서 근무하며 살인사건 재판 심리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며 “피해자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이 사람이 어떻게 살인을 저지르게 됐는지도 깊이 고민하게 된다”고 했다. 청각장애인 360여명을 상대로 280억원대 사기를 저지른 이른바 ‘행복팀 사건’을 권 판사가 언급하자 아이들은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조르기도 했다.

이양은 법원을 떠나며 “평소 법에 관심이 많아 법조인이 되고 싶었다”며 “실제 법대에 앉아보니 신기했고 기분이 색달랐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웃었다. 법원 관계자는 “보조 인력이 확보되면 청각장애인도 판사로 근무하는 데 문제가 없다”며 “조만간 청각장애인 1호 판사가 나오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