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주의 작은 천국] 꽃은 두 번 피어난다

입력 2017-04-22 00:05
연분홍 벚꽃 가지 뒤로 물한계곡교회 건물이 보인다. 교회는 사람들이 거듭나고, 거듭나길 원하는 이들이 꽃이 되어 피는 곳이다.
김선주 영동 물한계곡교회 목사
나무를 심었습니다, 2년 전 교회 앞마당에. 자두나무 한 그루와 살구나무 한 그루. 나무가 자라 풍성한 열매가 맺혔을 때 아이들이 왁자하게 몰려와 즐거워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심었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에 나무를 심는 사람은 바로 그 나무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열매 맺는 나무면 그 열매에 대한 꿈도 있습니다. 나무를 심는다는 건 꿈을 심는 것입니다. 소박한 꿈이 열매 맺길 바라는 마음을 타고, 앞마당에 심은 나무를 바라보는 내 시선을 타고, 몽실몽실 봄이 왔습니다.

살구나무는 벌써 덩치가 커서 지난해 첫 열매를 맛봤습니다. 꽃과 가지마다 벌들이 붕붕거리며 입맞춤하는 걸 보니, 올해는 더 많은 열매를 맛볼 것 같습니다. 꽃은 봄을 그리워하는, 벌 나비의 꿈이 피워낸 이 땅의 삶입니다.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하면 그 그리움은 꽃으로 피어납니다. 당신은 누군가의 간절한 그리움이 피워낸 꽃입니다.

꽃은 벌과 나비가 찾아올 때 또 한 번 꽃으로 피어납니다. 꽃은 꽃이되 다른 꽃으로 재탄생하는 겁니다. 나무에서 피어난 처음 꽃과 벌 나비가 찾아오는 꽃은 ‘같은’ 꽃이 아닙니다. 벌 나비에 의해 수정 과정을 거친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한 성숙한 꽃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꽃은 두 번 피어납니다. 김춘수의 시 ‘꽃’은 바로 이런 의미의 차원 다른 꽃을 노래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어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이 구절의 주어를 바꿔 다음과 같이 말하면 어떨까요. “벌 나비가 꽃을 찾아오기 전에는/꽃은 다만/하나의 꽃에 지나지 않았다.//벌 나비가 그를 찾아왔을 때/꽃은 나와 너, 그리고 우리에게/아름다운 꽃이 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집안에 사람 발길이 끊기면 그 집안은 다 된 거다”라고. 꽃가지에 벌 나비가 찾아오지 않으면 나무는 성장하지 못하고 성숙할 수 없습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생식과 번식을 못하는 상태로 머물러 있게 됩니다. 생물에게 그것은 살아있으나 죽어있는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공동체는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는 곳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만나 서로의 삶을 나누는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아픔을 향해 내 마음을 쏟아놓고, 눈물샘을 터뜨려 상처와 아픔을 씻어주는 공동체입니다. 오직 나 하나 복 받고 구원받아 이 세상에서 잘 살다가 천국 가는 통로는 아닙니다.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은 처음 피어나는 꽃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두 번 피어나는 꽃은 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꽃은 나와 함께하는 당신이 있는 그 곳, 아름다운 교회공동체에서 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 갑니다.

<김선주 영동 물한계곡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