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빛(28·여) 목사는 결혼한 지 6개월이 갓 넘은 새댁이다. 남편은 전도사로 바쁘게 활동하고 있다. 한창 신혼생활에 빠져 있어야 할 시기. 강 목사의 요즘 일상은 태권도 검도 연마와 체력훈련으로 채워져 있다. 무슨 일일까. 나흘이 지나면 군에 입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병역의무도 없고 더군다나 결혼한 여성인 그가 군 입대를 자원한 것은 여성군종장교가 되기 위해서다.
“절대 신앙을 갖지 않을 것 같던 남자들이 군에서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고백하는 걸 여러 번 겪었어요. 철부지로 지내던 청년들이 병역의무를 통해 인격적으로 성숙해지는 시기에 저처럼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해맑게 웃는 강 목사의 얼굴에 의외로 강한 신념이 내비쳤다.
오세현(35) 목사는 두 번째 입대를 앞두고 있다. 군대 갔다 온 성년 남성들이 한밤중 악몽으로도 꾸기 싫어하는 ‘두 번 군대 가는 사나이’를 자처한 것이다. 역시 군종장교 요원으로 오는 26일 입대해 기본 군사교육훈련을 받아야 한다. 다시 군에 입대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군 사역이 하나님께서 제게 맡기신 사명”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계기는 20대 초반 입대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 재학 중 징집돼 한창 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극단적 선택 위험이 있는 병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 제 신앙으로 그 후임에게 도움을 줬습니다. 누구든 절실하게 잡아야 했던 그 병사에게 제가 전한 복음이 목숨을 살린 일이 됐죠.”
정명석(26) 목사는 현역 군종 목사인 친형을 따라 후보생이 됐다. 지난해 공군 군종목사로 임관한 형과 함께 오랜 기간 같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바로 한국교회에 남성 성도 비율이 자꾸 줄어간다는 것이었다. 정 목사는 “더 많은 남성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군종목사직”이라며 “군 선교는 한국교회 미래를 위한 귀한 사역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군목 공군 중령으로 전역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지원한 우경윤(27) 목사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사역을 보고 자랐다. 군은 전도의 황금어장이라고 생각했다. 영혼을 살리는 군목으로 쓰임 받는다는 사실에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한다”고 했다.
일선부대 일반장교로 ‘잘나가다’가 평생 봉사직인 군종목사에 지원한 후보생들도 여럿 있었다. 힘든 군 생활 속에서 신앙이 흔들리던 병사를 도와줬던 경험, 복음을 모르던 병사가 감화돼 신앙인이 돼 가는 모습 등을 보고 아예 직업을 바꾸게 됐다는 것이다. 김요한(28) 목사는 “장병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놓치지 않도록 불철주야 기도하고 발로 뛰겠다”고 다짐했다.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창경궁로 한국기독교군선교연합회관 1층 세미나실. 예비 군종목사들이 어떻게 군선교 활동을 해 나갈지 간절히 답을 구하고 있었다. 기도와 찬양, 특강, 영성훈련이 온종일 이어졌다. 장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전할 예비 군목들의 눈빛에는 진지함이 묻어났다.
한국기독교군선교연합회(MEAK·이사장 곽선희 목사)가 지난달 29∼31일 주최한 ‘제33회 군종목사 후보생(75기) 수련회’ 과정이었다. 올해 군종목사 후보생은 모두 37명, 자발적으로 참가하는 수련회에는 33명이 참석했다.
군목 후보생들은 9주가량 군사훈련을 받고 정식으로 복무하게 된다. 3년간은 의무 복무다. 한국기독교군선교연합회 총무 김대덕 목사는 “총검보다 강한 군선교 사역자들의 영성이 전군을 향한 복음전파의 선봉에 설 것”이라며 기대하고 있다.
군종목사가 되는 방법은 두 가지다. 군종사관 후보생 시험에 합격하는 것과 군종장교 요원으로 선발되는 것이다.
군종사관 후보생은 신학계열 2학년을 대상으로 임관 6년 전에 선발시험을 치른다. 시험에 합격해도 만 28세까지 목사안수를 받아야 군목이 될 수 있다. 군종장교 요원이 되려는 목회자는 각 교단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
■ 군종목사 시작은 해군
군종제도 6·25전쟁 중 시행
군종목사 현재 260여명
우리나라 군종목사(군목)의 기원은 해군에서 시작됐다.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은 비공식적으로라도 군종 목사 제도를 운영하기로 결심하고, 1948년 이화여고 교목인 정달빈 목사를 초빙했다. 당시 정 목사는 정식 군목의 명칭은 얻지 못했지만 낮에도 밤에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했다. 일제 지배에서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고 정치적 혼란기라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이도 군에 많았다. 해군은 그런 정 목사를 미군 군목실에 파견해 군종업무 정립과 실습기회도 제공했다. 해군본부 예배실이 마련됐고, 49년 2월에는 군인관사 33호에 용산군인교회가 설립됐다.
정식 군종제도는 6·25전쟁 중 시행됐다.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한 카투사 사병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진정서를 올렸다. 이 병사는 “우리 군에도 성직자가 들어와 전투에 임하는 장병들을 신앙의 방패로 무장시키고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게 해 주시고, 전장에서 전사하더라도 믿음을 갖고 죽게 해 달라”고 간절히 청원했다.
이후 군종 창설 문제가 본격 논의됐다. 각 종단도 성직자의 종군 필요성을 요청했다. 이에 이 대통령은 50년 12월 31일 “군목이 각 군에서 일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듬해 2월 7일 육군군종제도가 정식 창설됐다. 이때 군종은 무보수 촉탁으로 운영돼 민간 목회자의 헌신이 컸다.
51년 28명의 육군군목 제1기가 임관했고 52년 공군이 군종업무를 시작했다. 52년 5월 20일 국방부에 군종실이 설치됐다. 이후 52년 6월 유급문관으로 격상됐고 54년 12월에는 현역장교로 다시 격상되면서 오늘날 군종제도가 자리 잡게 됐다. 현재 우리나라 국군장병은 약 60만명, 군종목사 수는 260여명이다.
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미션 현장] “충성” 하나님 戰士로 命 받았습니다
입력 2017-04-22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