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봄 이맘 때 사랑하는 이를 천국으로 떠나보냈다. 초록 이파리와 붉은 꽃봉오리가 서로를 밀치며 앞 다퉈 피어나는 동안 어떤 생명은 고요히 사그라졌다. 생장과 소멸. 서글픈 생명의 역설을 느꼈다. 그때 C S 루이스의 ‘헤아려본 슬픔’(홍성사)을 펼쳤다. 루이스가 아내를 잃은 뒤 그 슬픔을 기록해 나간 것이다. 아내에 대한 그의 회한 비탄 아픔이 물결치는 글들이었다.
루이스는 격렬하게 감정을 토로했고 그녀를 충분히 추억했다. 고통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그 고통에 몰입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글쓰기는 애도의 방법이었다. 그러다 루이스는 어느 순간 멈춘다.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그녀의 고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연인이라니….’ 자기 고통이 아내를 잃은 자신에 대한 연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어찌 보면 자신의 슬픔이 이기적 감정이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두고 세상을 떠나간 아내의 고통이 남겨진 남편의 슬픔보다 더 클 수도 있다. 게다가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에서 보면 이 사건은 한 생명의 소멸에 지나지 않는다. 루이스는 비로소 자신의 상실에 대해 거리를 두고 아픔을 관조하게 된다. 그는 천천히 슬픔의 자리에서 발을 뗀다.
고통 속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적 힘이 발휘된다. 나치 시대 유대인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에 수용돼 있었다. 어느 날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작업장으로 가고 있었다. 감시병이 발길질을 하고 고함치며 소총 개머리판으로 행렬을 위협했다. 한 남자가 그에게 속삭였다. “제발 마누라들이 지금 우리가 당하는 일을 몰랐으면 좋겠소.”
그 말을 들은 프랭클은 머리 속으로 아내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하고 웃는 것을 상상했다. 그러자 아내의 모습이 태양보다 더 밝게 빛났다. 행복을 느꼈다.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청아)에서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목표가 사랑이라는 것을 간파했다”고 한다. 그는 아내에 대한 기억으로 수용소 생활을 견딘다. 우리는 사랑과 연대의 힘으로 여러 고통을 견딜 수 있다.
내가 상실과 자책의 고통 속에 있을 때 한 지인이 우편으로 편지를 보냈다고 했다. 위로의 글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편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어찌된 일인지 편지는 도착하지 않았다. 하지만 긴 시간 나는 그 편지에 적혀 있을 내용을 상상하며 위로를 받았다. 상상만으로도 누군가가 내 아픔에 보내는 공감과 우의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혹시 지금 고통스러운가. 그것은 우리가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사랑을 떠올려보자. 상실이나 삶의 무게가 고통스럽다면 그 고통을 글로 적어보면 어떨까. 글쓰기를 통해 아픔의 치유를 돕는 책도 있다. ‘쓰기 치유’(국민북스)는 30년간 심리치료를 해온 저자 오경숙이 시를 읽고 쓰면서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을 안내하는 책이다.
우리가 쓴 글은 자신뿐만 아니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을 위로해준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고전 12:26) 나의 고통을 직시하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은 숱한 인생의 강을 건너가는 방법이다. 욥기가 이를 증명한다. 많은 이들이 고통에 던져진 욥의 목소리에서 자기 고통을 견딜 힘을 얻지 않나. 고통을 기록하는 이유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영혼의 도서관] 슬픔의 자리
입력 2017-04-22 0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