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 때 열병을 앓았다. 의사는 단순 감기라 했다. 주사를 맞고 열은 내렸지만 걷지 못했다. 소아마비였다.
부모는 딸의 장애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됐을 때 집배원이 취학통지서를 갖고 왔다. 엄마는 “그런 아이 없다”며 돌려보냈다. 이듬해 다시 집배원이 찾았을 때에야 생각을 바꿨다.
서울 마포구 백범로의 한 카페에서 18일 만난 김미경(56)씨는 기억 속 엄마의 모습을 천천히 묘사했다. “참 체구가 작고 여린 분이었는데 제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저를 업고 등하교를 시켜주셨어요. 저는 그 희생이 얼마나 큰지 깨닫지 못했어요. 장애를 가졌으니 당연히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절대적 조력자였던 엄마의 죽음은 김씨가 주변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 “제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는 건 생각도 못했어요. 하지만 엄마를 기억하고 싶었어요. 늘 자신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셨기에 엄마의 이름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게 방법이라 생각했죠.”
어려운 이들을 돕기로 결심했다. 북한의 고향땅을 그리워했던 어머니의 이름으로 1999년부터 월드비전의 북한동포 지원 사업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다른 장애인들도 돌보기 시작했다. “남편은 장애인을 위한 제도개선에 관심이 많았어요. 자신도 장애인이었거든요. 10대 후반에 당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뇌병변 장애를 갖고 있었죠.”
남편은 2002년부터 장애인지원단체의 지부장을 맡아 장애인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반찬을 무료로 나눠주는 일 등을 했다. 김씨는 선뜻 동참하지 못했다. “장애를 갖고 있는 분들의 초라하고 무기력한 모습이 거울 속의 나 같아서 우울했어요. 나도 장애인이지만 장애인을 마주하는 게 싫었던 거죠.”
생각이 바뀐 건 제대로 신앙을 갖게 되면서부터다. “할머니때부터 기독교 집안이었지만 전 선데이 크리스천이었어요. 제 처지를 비관하며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했죠. 매일 새벽기도 가던 엄마를 면박하기도 했어요.”
김씨는 40대 중반에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달았죠. 예수님은 걷지 못하는 이들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이들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잖아요. 긍휼히 여기셨고 사랑을 베푸셨어요. 돌이켜 보니 그 사랑이 어머니를 통해 제게도 전달됐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서울 은강교회(노명재 목사)에 출석하는 김씨는 남편과 함께 장애인을 돌보는 일에 뛰어들었다. 사역의 고비는 5년 전 남편과 사별하면서 찾아왔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 심해지는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모두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모른 채 장애인이란 이유로 낙담해 있는 이들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마음을 다잡고 장애인 돌봄 사역을 이어갔다. 지난해 10월부터는 수제비를 주 메뉴로 하는 식당을 열어 장애인들에게 무료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수익금도 장애인을 지원하는 데 사용한다.
“저를 포함해 장애를 갖고 있는 이 땅의 모든 분들이 사랑 받아 마땅한 동시에 사랑을 나눠 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런 인식이 널리 확산될 때까지 작은 힘이라도 끝까지 보탤 겁니다. 기도하고 응원해주세요.”
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사진= 강민석 선임기자
“사랑·나눔에 장애는 장애물이 아니더군요”
입력 2017-04-20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