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행정처가 진보 성향 판사들의 사법개혁 움직임을 견제하려 했다는 의혹이 진상조사 결과 일부 사실로 드러났다. 법원행정처가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며, 법관 독립성 수호를 위해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게 진상조사의 결론이었다. 다만 판사들의 뒷조사 파일 등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정황이 발견되지 않았다.
대법원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이인복 전 대법관)는 18일 국제인권법연구회(이하 연구회) 활동 축소 압력 등 법원행정처의 사법개혁 저지 의혹에 대한 26일간의 진상조사 결과를 사법부 내부전산망 ‘코트넷’에 밝혔다. 조사위는 이규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외부와 연계된 연구회의 공동학술대회를 연기·축소토록 압박한 정황을 확인했다. 판사들의 전문분야 연구회 중복가입 제한 조치도 결국 부적절했다고 조사위는 밝혔다.
이번 진상조사의 핵심은 연구회 소속이던 이모 수원지법 안양지원 판사가 올 초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발령받았다 돌연 사의를 표한 배경이었다. 이 판사는 발령 이후 행정처 생활을 문의하기 위해 지난 2월 14일 이 상임위원을 만났는데 “기획조정실 컴퓨터 속에 판사들을 뒷조사한 파일이 담겨 있다” “좋은 취지에서 한 거니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고 조사위에 밝혔다. 그는 충격을 받아 집에 돌아와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도 했다.
이 상임위원은 다음 날인 15일 이 판사에게 전화를 걸어 “연구회 측에 반박논리를 전파하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연구회 중복가입 제한 조치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을 다시 설득하라는 주문에 이 판사는 스트레스를 받았다. 다만 이 상임위원은 이 판사에게 ‘뒷조사 파일’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비밀스러운 대화를 할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라고 했다.
이 판사는 결국 2월 16일 사의를 표했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이날 이 판사에게 통화를 요청해 오해를 풀려 했다. 이때 이 판사는 “저를 데려오실 때부터 연구회와 관련해 부수적인 목적이 있지 않았나, 일석이조?”라고 물었고, 임 전 차장은 “그래!”라고 대답했다고 이 판사는 설명했다. 다만 임 전 차장은 “그래!”라고 말한 기억이 없고, 만일 그랬다면 흥분한 이 판사를 달래기 위해 “그래, 그래”라고 한 말이었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조사위는 ‘뒷조사 파일’은 결국 국제인권법연구회 행사에 대한 법원행정처의 대응방안 등 대책문건들이라고 추정했다. 판사들의 성향·동향을 분석한 ‘블랙리스트’는 아니라는 얘기다. 또 이 판사의 사의는 결국 이 상임위원의 부적절한 요구들 때문이라고 봤지만, 법원행정처 발령과 겸임해제 등 인사조치에 부당한 의혹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겸임해제의 경우 이 판사 스스로가 원했다는 것이다.
조사위를 이끈 이 전 대법관은 “대법원과 법원행정처는 현재의 사법행정권이 법관의 독립을 수호하기 위해 무엇을 자제하고 무엇을 염려하며 무엇을 확보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제도 개선의 지향점과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
“사법개혁 견제 일부 사실로… 블랙리스트는 없다”
입력 2017-04-19 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