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정규돈] 브렉시트의 정치경제학

입력 2017-04-18 17:34 수정 2017-04-19 10:38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가 시작되었다. 브렉시트는 영국에 영화로웠던 대영제국을 재현할 수 있는 새로운 도화선이 될까, 아니면 유럽 변방국으로 전락하는 계기가 될까. 현재 시점에서 대답은 비교적 후자에 가깝다.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영국은 유럽 내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EU 회원국이던 영국은 부시·블레어 시대 이후 미국과 EU 간 대립을 중재하는 중요한 위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브렉시트 이후 EU는 영국을 배제한 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러시아·중동 정책과 이민정책 등에 대항하려 할 것이다. 가치지향적인 EU 사회 내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이익지향적 언행은 오히려 EU27의 결속력을 강화시킬 소지가 크다. 재정위기와 난민위기, 브렉시트 투표를 거치면서 EU 내에서도 포퓰리즘이 신장된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은 수권능력을 갖추지 못했고, EU 집행위와 의회 내 세력도 미미한 편이다.

역내에서 영국이 고립된다면 교역과 투자의 흐름도 바뀔 소지가 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브렉시트는 영국에 결코 이롭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브렉시트 투표 이후 현재까지는 영란은행의 선제적인 통화정책 완화 및 가계의 차입증대 등으로 소비가 경기를 견인했으나 앞으로는 파운드화 약세와 이에 따른 물가 상승으로 인한 구매력 약화, 교역조건 악화 등의 부정적 여파가 더 크게 작용할 것이다.

향후 2년의 협상기간 동안 영국은 기조적인 경기하방 압력에 직면할 소지가 크다. 더욱이 영국이 EU와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 실패해 세계무역기구 체제를 준용하게 될 경우 지근거리에 있는 인구 5억명의 거대 단일시장 무관세 접근권이 사라지면서 상품에 평균 5%의 관세가 부과된다. 또 교역비중이 45%에 달하는 서비스 수출은 비관세장벽 부활로 사실상 중단되면서 무역 규모가 20∼25% 축소될 수 있다. 이는 영국 국내총생산(GDP)의 4% 정도에 이른다. 여기에 영국이 보유하고 있는 금융기관의 일자리 축소 효과를 감안하면 파장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러한 시장의 예측을 영국 정부가 모를 리 없다. 정치경제적 위상 축소는 영국 외교부와 재무부의 일관된 판단이기도 하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영국 지도부의 전략은 무엇일까. 외교적으로 영국은 미국의 대외정책에 지지를 표방하면서 글로벌 어젠다를 주도하려는 트럼프 행정부와 특수관계를 더욱 공고히 할 것이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단일시장 접근권을 최대한 유지한 채 수출시장 축소의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중국·인도 등을 대상으로 다자주의적 FTA를 추진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시장 간 거리가 멀수록 교역량이 줄어든다는 고전파 경제이론(중력모형)의 지적을 극복하기 위해 파운드화 약세를 바탕으로 영국의 강점이자 원거리에서도 접근이 가능한 서비스 분야의 수출 확대에 집중할 여지가 크다. 중국은 EU로부터 아직 시장경제지위를 인정받지 못해 고율의 반덤핑 관세를 물고 있거나 수입 규제에 묶인 품목이 많다. 중국의 시장경제지위 인정을 매개로 한 영·중 FTA는 이런 측면에서 중국에도 매력적이다. 친중(親中)노선을 통해 생성되는 지위를 활용해 영국은 미·중, 중·EU 관계의 거중 조정자가 되려 할 것이다.

브렉시트로 변화하고 있는 국제질서 아래서 우리는 안보 이익과 경제적 실리를 동시에 추구하기 위한 로드맵을 만들어야 한다. 안보를 위해 미·영 중심의 국제외교 질서에 보조를 맞추는 한편 경제적으로는 영국과의 새로운 FTA에 대비하되 수년간 적자를 보이고 있는 대(對)EU 무역수지 문제도 같이 해결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