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포커스-서승원] 위안부 재협상 논쟁을 보며

입력 2017-04-16 17:31

5월 대선을 향해 내닫고 있는 지금, 대선 후보들이 12·28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폐기 또는 재협상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문재인 후보는 원천 무효와 재협상, 홍준표 후보는 폐기, 안철수 후보는 폐기, 유승민 후보는 재협상 거부 시 파기, 심상정 후보는 폐기·국정조사다. 대선 공약이라고는 하나 한·일 관계는 물론 동아시아 국제관계가 과거사 문제를 매개로 다시 동요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일본 측은 당연히 실망과 우려를 금치 못한다. 일본 방위연구소는 차기 정권이 위안부 합의나 군사정보보보협정의 수정 내지 파기를 요구할 수도 있다는 예상을 내놓았다. 게다가 아베 신조 정권의 행보도 여전히 불쏘시개다. 최근 일본 문부성은 교육칙어(敎育勅語)를 유치원 등 조례에서 낭독하는 것을 용인했다. 교육칙어는 과거 군인칙유(軍人勅諭)와 함께 국민을 총동원 체제로 동원하기 위한 사상적 기제였다.

반일 감정을 국내 정치적 지지를 위해 오용·남용하게 되면 제대로 된 전략적 판단이 힘들다. 물론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 실현 차원에서 위안부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당장 차기 정부는 인권 문제와 한·일 협력을 조화시킨다는, 쉽지 않은 과제에 대처해야 한다.

박근혜정부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어떤 교훈을 남겼는지 먼저 살펴보자. 교훈 1. 박근혜정부는 출범에 즈음하여 독도·위안부 문제에 진전이 없는 한 정상회담에 응하지 않겠다는 초강수를 두었다. 정상회담 부재는 대북 공조, 경제협력 등 전면적 정체를 초래했고 관계 개선을 위한 실마리도 찾기 어려웠다. 대화의 전제조건을 너무 높게 설정하거나 과도하게 이슈를 연계한 것은 자충수였다.

교훈 2. 박 전 대통령은 안중근의사기념관 건립, 한·중·일 회담 시 대일 압박 등 한·중 연대 자세를 취했다. 전승절 참석으로 친중반일 노선이란 비난도 받았다. 하지만 FTA, 대북 압력, 통일 논의 등의 대가로 사드 반대와 대일 공동 대응(집단적 자위권, 역사수정주의, 영유권)을 요청한 시진핑 지도부의 시도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참고로 일본 측은 한·중 긴밀화를 구실로 ‘미일(안보) 대 한중(과거사)’ 대결 구도로 몰고 갔다.

교훈 3. 위안부 문제를 위해 박근혜정부가 선택한 무대는 미국이었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아베 정권의 폭주를 견제해야 하며 일본의 잘못된 역사인식이 동북아 평화를 저해하는 요인이라고 역설했다. 실질적으론 한·미·일 틀을 활용한 셈이다. 이에 미국 버락 오바마 정권은 한·일 과거사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관례를 깨고 일본 압력에 나섰다. 아베 담화와 위안부 합의에서 다소라도 성의를 표한 이유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한·일의 경합은 극히 소모적이다.

교훈 4. 한·일 관계 악화의 최대 희생양은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전략이었다. 한·일 군사 협력이 관건이었기 때문이다. 재균형 전략의 목표는 북한과 중국에 대한 방어망 구축. 상대는 당연히 방어망 돌파를 시도한다. 그리고 한반도는 또다시 지정학적 완충지대로 되돌아간다. 이 지정학 게임에 가담하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대일 강경론을 폈는지 궁금하다. 만약 그랬다면 지정학 게임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값진 노력으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정학 게임을 결과적으로 견제해 온 민족주의 게임은 동력을 잃었다. 강대국의 편 가르기, 줄 세우기 속에서 중견국론이 사라지고 반도숙명론이 다시 등장했다. 남은 것은 국내의 평화주의적 압력과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경제적 압력이다. 물론 일본처럼 지정학 게임에 가담하기로 결정했다면 이러한 논의는 불필요하다.

서승원 고려대 교수(글로벌일본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