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예술의 가격은 얼마인가

입력 2017-04-17 05:03
지난 6일 수원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열린 ‘무티 베르디 콘서트’의 한 장면. 리카르도 무티가 세계적인 지휘자이지만 경기도문화의전당이 2회 공연에 약 3억원을 지불한 것은 과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경기도문화의전당 제공
문화예술의 가치를 정량적 화폐단위로 환산하고자 하는 시도는 그동안 다양하게 있었지만 쉽게 정의되지 않았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그 이유를 문화가 경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논리로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문화예술계에서는 돈의 논리가 역전된 형태로 작동하기도 한다. 반 고흐의 ‘해바라기’를 예로 들어보자. 이 작품을 그리는데 화가는 얼마나 많은 비용이 필요했을까. 캔버스와 물감, 만약 들판에서 따 온 꽃이 아니라면 꽃집에 지불할 꽃값 정도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이 그림은 원재료 가격의 수백만배, 아니 그 이상의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심지어 고흐는 그 돈을 만져보지도 못하고 광기와 가난 속에 삶을 마감했다).

이처럼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 때문에 돈의 논리를 부정하며 경제적 가치를 높이는 현상이 바로 문화계의 역전된 경제 논리이다. 경제 논리를 역전시키기 위해서는 ‘신념의 생산’이 필요하다고 부르디외는 주장한다. 사람들이 고흐의 그림을 소장하기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그런 고액의 거래를 사람들이 수긍하는 이유는 그 작품이 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회적 믿음, 즉 신념 때문이라는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빈민 아동들을 데리고 창단한 엘 시스테마도, 이스라엘과 중동 지역의 청소년들로 결성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도 모두 음악의 가치를 공익과 평화를 위해 환산시킬 수 있다는 신념의 증명으로 유명해진 사례다.

한국음악계도 그런 신념이 탄생하는 현장을 경험한 바 있다. 1974년 피아니스트 정명훈이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2위에 입상했을 때다. 대회가 세계 공산정권의 심장부인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다는 이유로 한국 정부는 정명훈을 협박하며 대회 참가를 방해했다. 그의 승전보를 듣고 윤이상처럼 납치해서 감옥에 가두는 대신 화려한 카퍼레이드 개선행진을 마련해 준 것은 한국 공연기획 1세대 이종덕의 작품이었다. 이 환영행사 덕분에 정명훈은 국가보안법 위반자에서 공산주의 국가조차 인정한 자유 대한민국의 자존감을 높인 예술총아로 변신할 수 있었다.

이 사례들이 중요한 이유는 그렇게 생산된 예술적 가치에 대한 믿음이 향유자를 넘어서 범사회적으로 공유됐기 때문이다. ‘내’ 삶에는 해당사항이 없지만 ‘우리’가 공유하기에 아깝지 않은 공공의 가치. 이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특히나 태생적으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엮여 있는 클래식 음악은 공연장 안의 관객들을 만족시키는 것만큼이나 공연장 밖의 감시자들을 설득하는데 세심한 공을 들여야 한다.

열흘 전 이탈리아 지휘자 리카르도 무티와 경기 필의 협연은 관객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연주였다. 무티와의 조합으로 경기필의 국내 지명도는 높아졌고, 성시연 감독 체제 아래 한창 성장 중인 악단의 기량에도 긍정적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런 거장을 클래식의 변방에 모시기 위해 지불한 3억원의 개런티는 사실 바가지라 할 수는 없다.

다만 공공기관인 경기도문화의전당이 지금 이 시점에 그러한 용도로 지출해야 했는가는 비판적으로 재고해볼 문제다. 중산층이 붕괴되고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진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건드리는 기획은 그렇지 않아도 ‘그들만의 리그’라 비난받는 클래식 음악계를 더욱 궁지로 몰 수 있다. 유전유죄 무전무죄의 시대, 공연장 안을 넘어 바깥까지 미치는 기획자의 혜안이 필요한 시대이다. 앞서 우리는 서울시향 사태를 경험하지 않았는가.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문화정책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