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노트] 졸혼

입력 2017-04-14 17:33
몽파르나스 공동묘지 벤치의 노부부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 안을 걸었다. 보들레르나 모파상이 영면하고 있어서 찾은 건 아니다. 온종일 파리 번화가를 걸었더니 오토바이와 자동차 소리에 귀가 화끈거렸는데, 묘지 안의 적막으로 귀를 좀 식혀주고 싶어서였다. 빼곡하게 들어찬 대리석 묘를 보니 ‘죽고 나면 다 무슨 소용이야’라는 흔해빠진 말 한 마디에 걱정은 다 날아갔다. 노부부가 벤치에 앉아 누군가의 무덤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죽은 가족을 찾아왔나, 먼저 떠나보낸 아들이나 딸이 있나, 집이 근처라 그저 산책 삼아 나왔나. 그게 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묘를 보며 ‘내가 죽으면 어디에 묻어 달라고 할까, 묘지 대리석은 어떤 색깔이 좋을까, 마누라 옆에 꼭 묻어 달라고 해야지’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을까.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던 할아버지는 오른손으로 할머니의 등을 받쳐주며 느리게 묘지 밖으로 걸어 나갔다.

졸혼(卒婚). 중장년 부부를 오랫동안 상담하면서 우리나라에는 이미 졸혼이 유행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오랫동안 참아왔던 남편의 못된 습관을 더는 못 견디겠다며 작은 오피스텔을 얻어 혼자 사는 아내, 은퇴하고 농사짓는 것이 꿈이라며 시골에 따로 집을 얻어 사는 남편, 한 집에 살지만 각방 쓴 지 오래되었거나 방은 같이 써도 트윈 베드에 따로 자는 쇼윈도 부부까지. 기러기아빠도 위장된 졸혼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런 부부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이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혼하지는 않을 거라고.

누구나 졸혼 생각을 한두 번쯤은 하지 않을까. 사랑이라는 감정의 부식성 때문에 부부가 오래 같이 지내다보면 숙명적으로 멀어질 수밖에 없다. “나는 졸혼할 마음이 전혀 없다”고 목청 높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경우 십중팔구 배우자가 “이제는 떨어져서 살자”라고 한다. 이런 사례는 거의 대부분 남자다.

결혼을 졸업하고 부부가 따로 살면 행복해질까. 아무 문제없이 그저 좋기만 하다면 신이 남자와 여자를 부부로 맺어주지도 않았을 거다. 신이 부부에게 내준 숙제를 다 풀지 못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싸우고도 같이 살아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부부 갈등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은, 무덤에 묻히는 바로 그때밖에 없다.

김병수(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