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냉전시대로 규정한다면 냉전이 끝난 21세기의 현저한 특징은 세계화일 것이다. 1917년 제정 러시아에서 볼셰비키혁명이 시작된 이래 냉전의 빗장은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을 양대 세력으로 갈라놓고 색깔 논쟁과 패거리적 진영논리로 가둬놓았다. 그 굳게 닫힌 문이 70여년 만에 풀리면서 봇물이 터지듯 거대한 인구이동의 쓰나미가 지구촌을 덮쳤다. 이는 다양한 인종과 이데올로기, 문화와 종교를 각각의 게토로부터 끌어내 사방으로 흩음으로써 전대미문의 세계화현상을 부추기고 있다.
인구이동의 흐름은 대체로 경제 정치 사회 종교 상황이 어렵거나 갈등을 겪고 있는 곳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상황이 나은 곳으로 진행된다. 과거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잿더미가 되었던 우리나라도 눈부신 경제발전과 한류의 영향으로 이제 인구이동의 흐름을 끌어당기는 강력한 흡인력의 진원지가 됐다.
다양한 나라와 문화권, 언어집단으로부터 우리 곁에 다가온 이방인들이 많아졌고, 얼마 전만 해도 민족적 동질성이 특징이던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 이제는 세계 10대 다중문화도시(global cities)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인구이동이 급물살을 타고 있는 상황에서 냉전시대인 1970년대에 시작된 한국교회 선교운동은 틀과 전략을 대폭 수정하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 선교 현장은 아직도 상당 부분 20세기 관행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고 있다.
인구이동으로 ‘땅 끝’(행 1:8)이 우리 곁에 다가오면서 선교사 파송국과 선교지의 구분이 사실상 사라졌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머나먼 곳에 있는 미지의 대상에게 선교사들을 보내는 것만을 선교로 이해하고 있다. 물론 여전히 선교사를 보낼 필요가 있는 곳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진행되는 세계화의 흐름을 타고 땅 끝으로부터 스스로 우리 곁에 다가온 이방인들을 외면한 채 세계선교를 논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다가온 땅 끝은 바울과 바나바 같은 타문화권 선교사를 파송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역사회에 기반한 교회가 선교공동체가 돼 그들을 복음으로 보듬어야 할 책임을 일깨워준다. 선교사를 선교지로 파송하는 교회(sending church)가 아니라, 우리 곁에 이방인들을 보내시면서 우리가 그들에게 이미 보냄 받은 집단(sent church, 요 17:18)임을 깨우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해야 한다. 교회는 이제 선교를 바울과 바나바에게만 떠맡기지 말고 다가온 땅 끝을 인식하고 보듬는 풀뿌리 선교공동체로 체질 전환을 단행해야 한다.
사도행전 10장에서 하나님은 ‘유대인의 사도’인 베드로를 이방인 고넬료에게 보내신다. ‘이방인의 사도’ 바울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예루살렘 교회에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사역하던 베드로의 선교적 책임도 못지않게 컸기 때문이다. 신약시대 로마제국은 엄청난 흡인력으로 주변 국가의 인구를 끌어들이는 거대제국이었다. 고넬료는 그 거센 물결을 타고 땅 끝으로부터 베드로 주변으로 이주한 이방인이었다.
10여년 전 한국을 방문했던 선교학자 테드 워드는 유대인 중심의 민족교회가 단번에 타문화권 선교로 넘어가는 멀리뛰기를 시도한 게 아니었음을 상기시켰다. 예루살렘 교회가 다중문화의 도전(헬라파 과부들 문제)을 회피하지 않고 감당한 사도행전 6장, 유대인에게 시선이 고착돼 있던 베드로가 다가온 땅 끝 고넬료를 인식하고 보듬게 된 사도행전 10장이 바울과 바나바를 타문화권 사역자로 파송한 사도행전 13장보다 앞선다는 사실이 근거였다.
세계화현상 같은 하나님의 선교적 섭리를 깨닫고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이야말로 자문화와 타문화 간의 커다란 간격을 좁혀주는 징검다리이자 건강한 타문화권 선교를 향한 바람직한 준비가 될 것이다. 한국교회 선교는 사도행전 6장과 10장을 생략한 채 바로 13장으로 직행했다. 이로 인한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길은 우리 곁에 다가온 고넬료를 지역교회 선교공동체가 적극적으로 품어내는 것 아닐까.
정민영 (성경번역선교회 선교사)
[시온의 소리] 다가온 ‘땅 끝’의 고넬료 보듬기
입력 2017-04-14 0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