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재난 역사를 살펴보면 세월호 참사는 특정한 날에 불쑥 불거진 사고가 아니었다. 1964년부터 2013년까지 10명 이상이 숨진 사고는 276건에 달했다. 두 달에 한 번꼴로 재난이 발생한 셈이다. 대한민국이 ‘참사 공화국’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위험사회를 넘어 초위험사회로 진입했다. 위험이 구조화·고착화된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위험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방치돼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저자 7명은 세월호 참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오로지 기억하고 기록하고 연대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과거 재난을 역사 속에서 불러냈다. 이들은 유가족을 만나고, 기사·기록·보고서를 뒤지고, 정부 정책을 분석하면서 대형 재난을 재구성하고 대안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남영호 침몰사고(1970)는 우리 연안에서 발생한 최악의 해난사고다. 탑승 인원을 몰라 피해자 규모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당시 내무부 교통부 해상해양경찰대별로 집계가 달랐다. 사망자를 최소 319명에서 최대 337명으로 추산할 뿐이다. 생존자는 단 12명.
남영호는 출항부터 위험을 안고 있었다. 승객은 정원을 넘었고 적재량은 4배가량 초과했다. 과적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죽음의 항해’를 감행한 셈이다. 다른 문제도 많았다. 선장과 통신사는 무자격자였다. 남영호가 조난 무전을 쳤지만 해경은 제때 응답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본 순시선과 제7관구해상보안본부가 한국 해경에 침몰 사실을 긴급 타전했지만 한국 해경은 묵묵부답이었다. 한국 경비정들은 골든타임을 한참 넘긴 뒤에야 사고 해역에 도착했다. 결국 300여명의 탑승객 가운데 일본 순시선이 8명, 한국 해경이 3명, 어선이 1명씩을 구조했을 뿐이다.
유가족들은 국가의 무능과 선주의 탐욕을 목도하고도 변변한 항변조차 하지 못했다. 박정희정권의 독재 공포가 일상에 깊게 드리웠고, 참사는 민주화 세력의 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구지하철 화재 사고(2003)는 지하철 사고 가운데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인명피해를 낸 참사였다. 이 참사로 192명이 숨지고 151명이 다쳤다. 승객의 방화로 시작된 화재는 참사로까지 악화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불쏘시개나 다름없는 객차의 재질, 1인 승무원제로 인한 안전인력의 부족, 취약한 방재시스템 등이 맞물리면서 대참사로 이어졌다. 1년 뒤 홍콩에서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14명이 찰과상을 입은 것과는 크게 대비되는 참사였다.
전남 여수국가산업단지 대림산업 폭발사고(2013), 전남 장성효실천사랑나눔 요양병원 화재 참사(2014) 등 이 책에 소개된 사고 7건의 가장 큰 원인은 국가의 무책임과 기업의 탐욕으로 요약할 수 있다.
대부분 기업주는 법망을 빠져나가고 현장 책임자 등 ‘피라미들’만 처벌을 받았다. 관리감독의 책임을 준엄하게 물은 적도 별로 없다. 참사가 있을 때마다 대책을 발표하지만 대체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세월호 참사와 판박이다.
작가들은 말한다. “참사를 둘러싸고 누구는 정의와 단죄를 말하고 누구는 회복과 화해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과 기록이 우선돼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기억과 기록이 가능하고, 진실이 드러날 때만 합당한 치유와 보상, 유사 사건의 재발 방지, 용서와 화해를 통한 공동체의 회복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염성덕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sdyum@kmib.co.kr
[책과 길] 우리는 왜… ‘익숙한 슬픔’을 반복하는가
입력 2017-04-14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