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어떤 사람들

입력 2017-04-11 17:17

스타벅스의 설문조사에 참여하다가 ‘직원이 나를 알아보기 위해 노력했다’는 항목에서 멈칫했다. 단계별로 점수를 부여할 수 있었는데, 어느 쪽이 스타벅스 크루들이 원하는 방향인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당연히 고객을 알아보는 쪽이 지향점인 것 같았지만, 그게 정말 스타벅스의 매력과 일치하는 방향인지에 대해 의심해봐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직원이 나를 알아보지 않는다’는 믿음 하나로 스타벅스를 선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카페에 갈 때와 노트북을 들고 작업하기 위해 카페에 갈 때의 선택 기준은 다를 수밖에 없다. 작고 개성 있는 동네 카페들을 몇 차례 찾아가보기도 했는데 작업 공간으로는 적합하지 못했다. 세심한 배려가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랄까. 어느 카페에서 외투를 걸쳤다가 벗어서 의자에 걸어놓기를 두 차례 반복한 적이 있었다. 짧은 소매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외투를 벗으면 서늘하고 걸치면 답답해서 입고 벗기를 반복했던 것이다. 잠시 후 내게 작은 담요가 전달되었다. 외투는 무겁고 반팔은 서늘했던 사람에게 적절한 처방이긴 했으나 그 섬세한 배려와 내 작업의 효율은 슬프게도 반비례했다. 나는 한 시간도 채 앉아있지 못하고 그곳을 나왔다.

이런 경험도 있었다. 자리에 앉고 보니 음악이 나오지 않고 있었고, 손님은 나뿐이었다. 카페 주인과 나 사이의 거리는 5미터도 안 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이 음소거 상태를 해제해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단지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왔을 때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카페에 왔는데, 여기 너무 조용해.” 내 말이 끝나자마자 서서히 음악이 깔리기 시작했다. 주인의 의욕은 고마웠지만, 관건은 타이밍이었다. 어쩐지 또 조심스러워지니 말이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떤 손님들이 카페에서 원하는 건 단역일 수도 있다. 그들은 음악이 없거나 와이파이가 안 된다고 해도 당황하지 않는데, 다만 자신이 관찰자라고 철저히 믿고 있어 그 믿음이 전복되면 허둥대기 시작한다. 생태계가 교란되었다는 듯이.

윤고은(소설가), 그래픽=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