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찬 심진경의 명작은 시대다] 불안한 청춘의 표정과 부끄러움

입력 2017-04-12 00:00
1960년대 서울의 풍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사동과 화신백화점 인근의 모습. 60년대 서울은 김승옥 소설의 배경이자 주제, 그리고 주인공이었다. 필자 제공
각각 영화 ‘안개’의 포스터와 스틸컷. 김수용 감독의 영화 ‘안개’(1967)는 ‘무진기행’을 각색한 것으로 김승옥이 직접 각색 작업에 참여했다. 김승옥은 이듬해 김동인의 ‘감자’를 직접 각색, 감독하기도 했다.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은 1966년에 나온 김승옥의 첫 단편집이다. 이 책은 이듬해 말까지 일간지가 발표하는 베스트셀러 목록에 꾸준히 오를 만큼 오랫동안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작가 김승옥은 같은 해 대중 종합잡지 ‘주간한국’에서 실시한 ‘지식인 100인의 선정 오늘의 작가 5인’이라는 설문조사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어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만큼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은 대중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소설집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고작 스물다섯 살이었다. 특히 표제작인 ‘서울, 1964년 겨울’은 1965년 최고의 문학상인 동인문학상을 수상했고, 같이 실린 ‘무진기행’은 지금까지도 작가지망생들이 가장 필사하고 싶은 작품 1위를 할 만큼 사랑받고 있다. 당대에 이 책의 대중적 인기는 대단한 것이어서, 청춘영화에 등장하는 대학생들이 이 책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장면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줄 정도였다. 그렇다면 김승옥 소설의 무엇이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일까?

김승옥 소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시골에서 상경한 촌놈’의 서울 적응기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한국사회는 근대화의 물결에 휩쓸렸다. 대중들은 삶의 급격한 변화를 몸으로 실감하면서 근대화에 대한 어렴풋한 기대와 불안에 사로잡혔다. 서울은 그 근대화의 중심이었고 모든 욕망이 집결하는 장소였다. 책에서 읽고 배운 높은 이상에 대한 기대를 품고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 온 순수한 대학생들은 서울살이의 혼란을 겪으며 이내 절망한다. 그들이 애초 품었던 높은 기대와 이상은 차가운 환멸로 뒤바뀐다. 그들이 경험한 서울은 세속적인 욕망만이 지배하는 천박한 속물들의 전쟁터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죽는 날까지 이 서울에서 내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절망감”(‘역사’)에 사로잡힌다. 그렇다면 이 냉혹한 세상을 어떻게 견디면서 살아낼 것인가? 이 질문이 김승옥 소설의 청춘들을 사로잡고 있다.

김승옥의 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불안에 흔들리고 부서지는 저 절망한 청춘들의 내면 풍경이다. 세상은 불안정하고 자기의 미래는 더 불확실하다. 그 속에서 그들은 심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서울의 삶에 그래도 적응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한편으로 안정된 세속적 삶에 대한 욕구를 차마 버리진 못하면서도 그것이 요구하는 속물적인 생존 방식에 대해서는 극도의 거부감을 보인다. 순수했던 청춘의 내면은 그렇게 분열된다. 그들의 내면은 순응과 거부, 체념과 환멸, 자학과 위악, 불안과 무관심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복잡 미묘한 감정의 무늬로 채워진다. 김승옥이 그려놓은 것은 거대한 혼돈으로 들끓는 저 청춘의 표정이었다.

그 불안한 청춘의 내면을 김승옥은 “자기세계”라고 불렀다. 자기세계란 무엇인가? 자기세계는 남의 세계와는 다른, “함락시킬 수 없는 성곽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곰팡이와 거미줄”이 쉴새 없이 자라나는 습하고 음침한 곳이기도 하다. 그에 대해 ‘생명연습’의 ‘나’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의 세계가 형성되는 과정이 한마디로 얼마나 기막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 과정 속에는 번득이는 철편(鐵片)이 있고 눈뜰 수 없는 현기증이 있고 끈덕진 살의가 있고 마음을 쥐어짜는 회오(悔悟)와 사랑도 있는 것이다.

이 자기세계는 우리가 아는 통상적인 자기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냉정함과 공포, 적대감과 후회, 사랑과 증오 같은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감정들로 이루어진 기이한 세계다. 그 모순적인 감정들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내부”를 “무관심한 표정으로 가려버리는 법”(‘환상수첩’)을 터득했을 때 비로소 자기세계는 완성된다. 김승옥의 인물들은 그처럼 냉정과 무관심의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며 살아가는 삶을 선택한다. 그래야 이 냉혹한 서울의 삶에 적응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울, 1964년 겨울’의 늙은 대학원생 안과 구청 공무원 ‘나’는 이러한 연기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 둘은 우연히 만나 술을 마시며 무의미한 대화를 나눈다. 그들은 이 세계에 아무런 관심도 호기심도 없다.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오직 자기만이 알고 있는 사소한 것들이다. 예컨대 지난 십사일 저녁 아홉시에 단성사 옆 골목 쓰레기통에 초콜릿 포장지가 두 장 있었다는 사실 같은 것. 그렇게 남들이 모르는 사소한 것에만 집착하는 이들의 포즈 자체가 냉정한 무관심을 연기하는 그들의 방식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기의 불안과 미래에 대한 공포를 잠재우면서 자기를 지키기 위해 분투한다.

기대와 포부로 충만한 젊음의 가능성을 저당 잡히고 자기 안의 젊음을 말소해버린 청춘.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세상에 대한 체념과 냉소뿐이다. 그에 절망한 인물은 자살하거나(‘환상수첩’) 그렇지 않으면 젊음의 순수와 열정을 버리는 대가로 적응하고 살아남는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도 끊임없이 그런 자신을 비판적으로 응시한다. 그들은 자신을 “늙어버린 원숭이”(‘환상수첩’)라고 말한다.

“김형, 우리는 분명히 스물다섯 살짜리죠?”

“난 분명히 그렇습니다.”

“나두 그건 분명합니다.” 그는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

“두려워집니다.”

“뭐가요?” 내가 물었다.

“그 뭔가가, 그러니까……” 그가 한숨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린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입니다.” 나는 말했다.


그들은 너무 일찍 시들었고 너무 빨리 늙어버렸다. 김승옥 소설 속 인물들의 내면은 이 조로(早老)한 청춘의 상실의 감각으로 가득하다. 4·19 혁명에서 섬광처럼 보았던 어떤 가능성이 5·16 군사쿠데타로 스러져버린 후 숨 막히는 좌절의 시대를 견뎌야 했던 청춘의 체념과 절망. 김승옥 소설의 이면에 숨어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시대의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그후 어떻게 살았을까? 이들이 냉혹한 세상의 질서에 가까스로 적응해 성공한 후 문득 자기의 과거를 되돌아본다면? ‘무진기행’은 시골에서 상경해 그렇게 성공한 촌놈이 과거의 기억이 묻어 있는 고향(시골)을 다시 찾아가는 이야기다. ‘무진기행’은 지금도 한국 단편소설의 걸작으로 널리 읽히지만 발표가 되기도 전에 사장될 뻔한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당시 하룻밤 동안 이 작품을 써내려간 김승옥이 완성된 원고를 그의 친구인 평론가 김현에게 보여주자 작품이 별로라며 찢어버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작가는 후일 원고료가 아쉬워 차마 찢어버리지 못하고 투고를 했다고 회고한다.

성공한 촌놈이 고향을 찾는다. 그곳이 무진이다. 제약회사 사장의 딸과 결혼해 전무 자리에까지 오른 윤희중에게, 고향은 이미 넉넉하고 아늑한 마음의 안식처가 아니다. 그곳 역시 서울의 삶을 모방하는 속물들이 득세하는 또 하나의 속물적 세계일뿐이다. 그곳의 “외롭게 미쳐가는 것”들 속에서 윤희중은 지워버리고 싶은 자기의 과거와 마주친다. 그가 무진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는 음악교사 하인숙이 그중 하나다. 그녀는 자기를 서울로 데려가 달라고 말한다. 그녀는 고향을 벗어나 서울로 탈출하기를 꿈꿨던 자기의 분신 같은 존재다. 그는 결국 서울로 데려가 주겠다는 하인숙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그녀 몰래 서울로 올라간다. 그러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덜컹거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윤희중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런데 이 부끄러움은 사실 윤희중 혼자만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김승옥 소설 속 청춘들이 서울에서 살아남기 위해 위장과 위악을 무기로 자기의 순수한 꿈과 열정까지도 파괴하면서 헤쳐 나온 그 시간들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김승옥의 소설은 세상의 질서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하면서도 그런 자신을 자학하는 인물들의 분열된 내면을 고통스럽게 응시한다. 윤희중의 부끄러움은 1960년대 개발독재 시기 세상의 질서에 그렇게 순응하며 살아남았던 작가 자신의 부끄러움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인물들 모두가 내면 깊숙이 끌어안고 있는 한 줌의 윤리이기도 하다.

물론 냉정하게 보면 김승옥의 소설에서 그 부끄러움의 윤리는 여성의 훼손을 딛고 선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것이다.(창녀와 교환의 대상이 된 ‘환상수첩’의 선애는 자살하고 ‘건’의 윤희 누나는 윤간당하며 ‘무진기행’의 하인숙은 버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한국사회에서는 그 한 줌의 부끄러움조차 희귀한 것이 되어버렸다. 생존과 성공만이 제1의 가치가 되어버리고 그것을 구실로 모든 불의와 몰상식이 정당화되는 오늘의 세태를 돌아보면 특히 그렇다. 오늘의 한국사회는 부끄러워하는 능력조차 상실해버렸다. 김승옥의 소설이 오늘의 독자에게 주는 울림이 가볍지 않은 이유다.

■ 김승옥은
60년대 혜성같이 등장한 문단의 총아
영화판 투신했다가 ‘광주 쇼크’로 절필


서울대학교 불문학과 2학년이던 1962년 ‘생명연습’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그가 주목할 만한 작가가 된 것은 ‘사상계’에 ‘무진기행’을 발표한 후부터이다. 그 이후 ‘차나 한잔’, ‘서울, 1964년 겨울’을 잇따라 발표하며 일약 문단의 총아로 떠오른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소설 집필이 뜸해지고 그 대신 영화계에서 활동한다. 영화 ‘안개’는 ‘무진기행’을 각색한 것으로 김승옥이 각색 작업을 맡았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그는 문학이건 영화건 일체의 모든 활동을 중단하는데, 그 이유는 광주의 참극 때문이었다. 그는 광주 학살로 인한 충격과 분노로 신문 소설 연재를 중단하고 그 이듬해인 1981년 그 자신이 “극치의 구원”이라고 불렀던 일련의 신비체험 속에서 신을 만난다. 이후 그는 성경과 주석서, 기도와 전도생활 속에 파묻혀 그의 소설쓰기는 완전히 ‘중단’되고 만다. 소설 속에서 구원을 찾아 헤매던 그는 소설 바깥에서 이를 찾았고 구원과 동시에 그의 짧은 소설 쓰기는 완전히 끝나고 만다. 그런 이유로 그의 소설들 중 대부분은 그가 20대였던 1960년대에 쓰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승옥의 소설을 1960년대의 여러 징후들과 분리시켜 독해하기는 어렵다. 그가 1960년대 작가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심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