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슬픈 범죄] 아기 세번 버린 어느 엄마의 이야기

입력 2017-04-10 17:53 수정 2017-04-10 21:24
일러스트=전진이 기자

지난달 14일 경기도 한 도시의 주택가로 노란 유치원 셔틀 차량이 들어섰다. 골목 미용실에 아들과 앉아 있던 장해원(가명·39·여)씨는 설레는 표정으로 문을 열고 나왔다. 그러곤 차에서 내리는 아들 민수(5) 손을 잡고 다시 미용실로 들어갔다. 평범한 모자(母子) 관계처럼 보이지만 하마터면 둘은 평생 모르는 사이로 지낼 수도 있었다.

2012년 해원씨는 갓 태어난 민수를 어느 교회 계단에 두고 왔다. 경찰 통계상 2012년 139명의 영아가 버려졌는데, 민수도 그중 한 명이었다. 밝은 표정이던 해원씨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4년 전 이야기를 들려줬다.

환영받지 못한 출생

대통령 선거가 한창이던 2012년 12월 초 어느 날, 해원씨는 아침부터 찢을 듯한 복통에 시달렸다. 통증은 전날 밤부터 계속됐다. 화장실에 가서 속옷을 내렸다. 선홍빛 이슬이 비쳤다. 초등학생인 첫째 딸 희은(당시 12)과 둘째 아들 동수(당시 8)가 등교한 뒤엔 진통 주기가 점점 짧아졌다. 해원씨는 방문을 열어보았다. 일거리가 없어 통 집에만 있는 남편 김용태(당시 40)씨가 막내 태수(당시 7)를 데리고 잠들어 있었다. 문을 조용히 닫았다.

아이들 다쳤을 때 사용하려고 사둔 비상상비약에서 소독약을 꺼냈다. 거실에서 가위도 들었다.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는 수건을 꺼내 파란 타일 위에 깔고 그 위에 앉았다. 2012년 12월 초 반지하방 화장실은 낮 12시여도 서늘했다. 타일의 한기(寒氣)가 수건에 스며들었다.

해원씨는 입에서 소리가 날까 어금니가 부러질 만큼 깨물었다. ‘골반이 부서져나가겠다’ 느낄 때쯤 미끄덩거리는 아기가 해원씨 몸 밖으로 나왔다. 해원씨는 가위로 탯줄을 자르고 소독약을 발랐다. 옆에 깔아놓은 수건 위에 아기를 올려놨다. 아기는 처음 만난 세상을 향해 맹렬히 울음을 터뜨렸다. 해원씨는 깜짝 놀라 검지와 중지로 아기 입을 막았다.

아기 입을 막은 채 화장실을 나왔다. 남편과 아들이 깰까봐 평소 입던 긴팔 티셔츠 2장으로 아기를 감싼 뒤 서둘러 집을 나왔다. 종이상자와 우산도 챙겼다. 3∼4도까지 내려간 기온 탓에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태반 등은 근처 공터에 파묻었다. 그는 빈 통장과 밀린 월세, 남편의 돈벌이를 떠올렸다. “또 애를 낳아! 미친년”이라고 욕했던 친정엄마도 생각났다. 그는 “이렇게 살아서 뭐해. 죽어야지”라고 되뇌었다. 5층짜리 상가건물 옥상에 올라가 죽을 생각을 했다. 그런데 가족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내가 죽으면 애들은 어떡하나. 아빠가 일 나가면 애들은 학교도 못 가고….”

해원씨는 집에서 500m 정도 떨어진 교회에 갔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인정이 있겠지.” 1층과 2층 사이 계단에 종이상자를 놓고 아기를 그 안에 넣었다. 오후 3시쯤이었다. 아기를 내려놓고 진눈깨비 내리는 길을 돌아왔다. 길 위에서 해원씨는 무너지듯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혼자 남은 아기도 본능적 생명력으로 간절하게 울었다. 태어난 지 2∼3시간 지난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건물 경비원은 처음엔 “왜 자꾸 고양이가 울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경비원은 버려진 지 30여분 만에 핏기가 채 가시지 않은 아기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내 아기 다시 데려 갈께요”

해원씨가 아기를 버린 다음날 오전 10시, 경찰 2명이 해원씨 집의 파란 대문을 두드렸다. 해원씨는 순순히 죄를 인정했다. 경찰이 들이댄 증거가 명확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죄책감을 외면할 수 없어서였다. 경찰이 수갑을 내밀자 해원씨가 기도하듯 두 손을 내밀었다. 남편 용태씨는 “아내가 임신 사실은 완강히 부인하고 루프(삽입식 피임기구)의 부작용으로 배가 불러온다고 해 병원에 가보라고만 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조사가 끝난 뒤 해원씨는 경찰에게 “제가 다시 애를 데려갈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경찰은 “차라리 못 키울 것 같으면 입양하는 게 어때요”라고 했다. “내가 죄인인데 그렇게는 못하겠어요”라며 해원씨는 울먹였다. 버린 아이를 찾아오는 것으로 속죄하고 싶었던 걸까. 그는 이날 보육원에서 아기를 찾아왔다. 해원씨는 돌아오는 길, 마트에 들러 분유 팩 스무개를 샀다. 아기에게 첫 분유를 줬던 그때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애기가 너무 잘 먹었어요.” 며칠 후 출생신고를 하고 이름을 민수로 지었다.

20일쯤 지났을까. 경찰로부터 “다시 한번 나오시죠”라는 연락이 왔다. DNA 검사를 해보니 2009년과 2010년 근처에서 유기된 아기의 엄마도 해원씨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었다. 해원씨는 각각 빌라 건물 복도와 주택 앞에 아기를 버렸다고 경찰에 실토했다. 두 명의 아기는 어디론가 입양됐다. 얼마 후 ‘비정한 30대’라고 제목을 단 기사가 나왔다. 검찰은 해원씨에게 징역 1년6개월을 구형했다.

1심 재판은 다음해 5월 열렸다. 피고인석에 앉은 해원씨 품에는 민수가 안겨 있었다. 해원씨가 우니까 민수도 울었다. 판사가 해원씨에게 발언 기회를 줬다. 해원씨는 일어나 “더 이상 할 말 없습니다. 다 인정합니다”라고 했다. 그의 말투엔 형량을 낮추려는 피고인의 안간힘이 없었다. 이어 “제가 감방 가야 하면 아기를 데리고 갈 수밖에 없고, 애 아빠가 막노동해서 먹고살아야 돼서 세 아이들을 키워줄 사람이 없어요”라며 울먹거렸다.

판사는 해원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해원씨는 판사에게 “그럼 저 감방 가야 해요”라고 물었다. 해원씨는 집행유예의 뜻을 정확히 몰랐다. 판사는 “아니, 안 가도 돼요. 나라가 해준 게 없어서 미안합니다. 이제 시(市)가 도와줄 거니까 아이 데리고 가서 잘 키우세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가난과 병약

해원씨는 23세 때 남편 용태씨를 만났다. 둘 다 가진 것 없는 집안 자식이었다. 친정아버지는 팔 수도 없는 밭 100평을 남겼다. 똥오줌 받아가며 부양한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남은 건 시누이가 교통비로 쓰라고 건넨 10만원뿐이었다.

가난과 병약(病弱)은 떨어질 수 없는 것인지, 부부의 몸은 부실했다. 해원씨는 태어나고 3일이 지나자 온 몸에 물혹이 생겼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유방에 물혹이 생겨 인공유방 수술을 했다. 척추도 틀어졌다. 남편은 선천적으로 뼈가 약했다. 누나가 운영하던 종이 박스 제작 공장에서 일하다 쇄골이 튀어나왔다. 영화 스크린을 만드는 회사에서 다쳐 손가락이 잘 접히지 않는다. 퇴행성관절염도 있다. 돈이 없어 치료를 못했다.

용태씨는 뼈와 관절이 약한 탓에 취직해도 권고사직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에겐 ‘하루살이 일거리’밖에 없었다. 공장 건설 현장에서 망치질을 했고, 인테리어 업자를 따라다니기도 했다. 해원씨가 아기를 버릴 당시 용태씨는 월 40만∼50만원을 벌었다. 겨울이라 특히 일이 없었다. 해원씨가 부업을 했지만 이미 선불로 돈을 당겨 쓴 탓에 추가 수입은 없었다.

월세 25만원을 내고 나면 가족이 입에 풀칠하기도 쉽지 않았다. 대통령 후보들이 밝은 미래를 약속하던 그 당시, 해원씨의 15평 반지하방에선 가족 5명이 미래 없는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고 있었다.

“저 애를 데려오길 잘했다”

해원씨네 여섯 가족은 여전히 형편이 어렵다. 남편이 ‘몸이 부서져라’ 일해 벌이는 좀 나아졌지만 아이가 하나 더 늘면서 들어가는 돈이 많아졌다. 해원씨는 마트에서 일하다 넘어져 왼쪽 팔꿈치 뼈가 부러져 팔을 제대로 펴지 못한다. 팔꿈치에 스프링을 넣는 수술을 하면 펼 수 있지만 800만원이나 하는 수술비에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래도 해원씨 가족이 사건 이후 지금까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임선민(52) 통합사례관리사 덕이 크다. 해원씨는 사건 당시 경찰을 통해 임씨를 소개받았다. 시 소속 사회복지사인 임씨는 공공과 민간의 복지서비스를 통합해 해원씨 가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지원 방법을 찾아줬다. 그는 해원씨 재판 당시 탄원서를 법원에 냈고, 병원을 연결해 용태씨 정관수술도 무료로 하게 해줬다. 해원씨 부부가 장사를 시작할 수 있도록 현대자동차의 트럭도 지원해주려 노력했다. 해원씨는 “선민 언니 아니었으면 저는 아마 애 아빠하고 이혼하고 애들도 뿔뿔이 흩어졌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해원씨는 4년여 전 일을 말하며 물티슈로 연신 눈물을 닦았다. 지나간 시간의 더께에 가려져 있던 죄책감이 불쑥 뛰쳐나오는 느낌이었다. “몰매를 맞아도 어쩔 수 없어요. 그런데 우리 애들 잘살고 있다는 것은 말하고 싶어요.” 그는 울다가도 몇 순간은 미소를 지었는데, 대부분이 막내 민수 얘기가 나왔을 때다. “민수가 얼마나 애교를 잘 부리는지 몰라요. ‘엄마 아빠 사랑해’라고 하고, 예쁜짓 하고, 형들하고 잘 놀고.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오늘 민수가 애교 부렸어요’ 하면 아, 내가 저 애를 데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해원씨 등 뒤 벽엔 민수가 붙였을 것 같은 카카오프렌즈 스티커들이 붙어 있었다.

글=윤성민 기자 woody@kmib.co.kr, 삽화=전진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