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언어유희… 삶에서 건져낸 통찰

입력 2017-04-10 18:51 수정 2017-04-10 20:58
‘웃음과 울음이 같은 음이라는 걸 어둠과 빛이/ 다른 색이 아니란 걸 알고 난 뒤/ 내 음색이 달라졌다’(‘생각이 달라졌다’의 일부).

천양희(75·사진) 시인이 새 시집 ‘새벽에 생각하다’(문학과지성사)를 냈다. 9일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소 활력이 없어보였으나 온화함이 묻어났다. 천 시인은 최근 인공관절 수술을 해 외부활동을 자제하고 있다고 했다. 등단 52년을 맞는 천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일상을 곱씹고 사유하며 통찰한 생의 이치, 삶에 대한 사랑을 담은 61편을 묶었다.

시집에서는 언어의 유희가 도드라진다. 빛과 어둠, 탁상시계와 탁상공론, 일이 꼬일 때마다 생각나는 새끼 꼬는 사람 등 말놀이가 넘쳐난다. 그러나 시적 모더니즘을 위한 유희가 아니라 삶에서 건져낸 통찰이 그런 말놀이를 가능하게 했다. 이를테면 이런 시들이다.

‘내가 속해 있는 대낮의 시간/ 한밤의 시간보다 어두울 때가 있다’(‘놓았거나 놓쳤거나’ 부분).

천 시인은 시집 속의 언어유희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세상의 모순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한 시적 전략이라고 할 수 있지요. 세상이 얼마나 모순 덩어리인가요? 그걸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매력이 없잖아요. 근데 이런 말놀이는 살아가면서 겪는 어려움을 넘어가기 위해 설치한 저만의 계단 같은 것이기도 하고요.”

그도 그럴 것이 웃음과 울음, 빛과 어둠 같은 건 앞뒤 붙어 있는 종이 같은 것일 수 있다. 천 시인은 “울음을 그친다고 금방 웃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울음을 제대로 지불해야 웃음이 나오지요. 어둠을 견디어 내야 빛이 오듯이….”

시인 김사인은 천 시인의 시 세계가 여림, 낭만성, 소녀 감성 등으로 해석돼 온 것에 반대했다. 온실의 화초나 마네킹으로 대변될 수 있는 아름다움과 구별되는 혹독함을 담고 있는 시라고 정의했다. 이번 시집에서는 그렇게 혹독함을 견디어낸 70대 노시인의 깨달음의 경지, 즉 ‘실패의 미학’빛난다.

“내가 살아질 때까지/ 아니다 내가 사라질 때까지/ 나는 애매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지상에는 나라는 아픈 신발이/ 아직도 걸어가고 있으면 좋겠다/ 오래된 실패의 힘으로/ 그 힘으로.”

거듭 실패하는 것이 실패의 힘이라고 말하는 천 시인은 자신이 겪은 실패의 내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누구라도 자기 삶에서 시가 나온다. 상처 받은 사람이 남의 상처를 보듬을 수 있다”는 말로 대신했다.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이들에게 이번 시집을 권한다. 천 시인은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박두진문학상, 만해문학상 등을 두루 수상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