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사랑의 서정을 겸비한 ‘화해의 시인’ 후백(后白) 황금찬(사진) 시인이 8일 새벽 4시40분께 노환으로 강원도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99세.
현역 문인 가운데 최고령으로 활약했던 시인은 기독교 사상과 향토적 정서가 담긴 서정시와 지적 성찰을 담은 시로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특히 그는 ‘시는 영혼을 구제하는 양식이며 세상의 난폭성을 없애려면 반드시 시가 필요하다’고 여겼기에 누구보다 치열하게 시를 썼다.
1918년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난 시인은 30여년 동안 강릉농업학교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시를 썼다. 48년 월간 ‘새사람’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51년에는 ‘청포도’ 동인을 결성했다. 53년 청록파 시인 박목월의 추천을 받아 ‘문예’와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65년 ‘현장’을 시작으로 ‘오월나무’ ‘분수와 나비’ 등 39권의 시집을 펴냈다. 그가 남긴 시와 수필은 8000편이 넘는다.
시인은 암담한 일제시대와 6·25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촛불과 같은 ‘어두움을 밀어내는 연약한 저항’으로 바람처럼 살아왔다.
‘시는 신을 기억하는 작업’이라고 말해온 그의 작품은 인간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어떻게 현실에 구현되는가에 대한 시선이다. 그는 시의 본질과 신의 섭리를 보기 위해서 영혼의 눈을 떠야 한다고 생각했다.
트레이드마크가 된 헌팅캡을 쓰고 온화한 미소를 짓던 시인은 후배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지난해 문인들과 교우들이 마련한 ‘백수(白壽) 감사예배’에서 제자들로부터 2018편의 필사집을 헌정 받았다. 2015년에는 황금찬 문학상이 창설됐다. 현재 그의 이름을 딴 문학관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시인은 대한민국문학상, 보관문화훈장,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을 받았다. 67년 김현승 시인과 함께 한국기독교문인협회를 창립하고, 기독교문학의 방향을 제시했다. 55년부터 서울 돈화문로 초동교회에 출석했다.
“내 몸의 중량이/ 바위일까 돌일까…풀잎일까 낙엽일까/ 내 말의 중량이/ 풀잎이나 나뭇잎만큼만 된다면…낙엽보다도 가벼운 내가/ 지금 걸어가고 있다.”(‘흔적’ 중에서) 시인은 낙엽보다 가벼운 몸으로 이 땅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시어들은 바위처럼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유족으로는 도정 도원 애경씨 2남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301호, 발인은 11일 오전 9시30분. 장지는 경기도 안성 초동교회묘지(02-2258-5940).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신앙과 사랑의 서정 겸비한 ‘화해의 시인’… ‘문단 최고령’ 후백 황금찬 시인 자택서 별세
입력 2017-04-09 2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