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마니아 ‘취향 저격’… 살길 찾는 동네 책방들

입력 2017-04-10 05:05
오래된 라디오와 시계 등 1980, 90년대 정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서울 용산구 디스레트로라이프. 주인이 직접 고른 소설책과 시집을 판매하는 용산구의 고요서사 한편에는 주인의 책상이 마련돼 있다. 종로구 더북소사이어티에는 사진 건축 디자인 등 예술서적이 진열돼 있고 자연환경과 연극 관련 서적을 갖춘 종로구 책방 이음은 개인 서재처럼 꾸며져 있다(사진 위쪽부터).
대형서점과 인터넷서점에 점령당한 책 시장에서 동네 책방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향수를 자극하는 복고풍부터 특정 분야 마니아들을 ‘취향 저격’하는 책방까지 다양하다. 동네 책방이 사라져가는 시대, 각자 개성을 살린 책방들이 나름의 생존전략을 바탕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9일 한국서점조합연합회의 ‘2016 한국서적편람’에 따르면 20평 미만 서점은 지난 10년간 급감했다. 2005년 1779개이던 소규모 서점은 2015년 685개로 10년 새 3분의 1로 줄었다. 같은 기간 대형서점이 전체 서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6%에서 13.4%로 늘었다.

그럼에도 아직 서울 곳곳에는 독특한 개성의 책방들이 남아 있다. 많지는 않지만 소박한 동네 책방만의 매력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 종로구 혜화역 4번 출구 인근에 있는 ‘책방 이음’은 책방 주인의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돼 개인 서재 같은 인상을 준다. 책 진열만 봐도 책방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진열대에는 ‘고래생태계’와 ‘독립영화제’ 카테고리가 마련돼 있다. 대형서점들이 베스트셀러를 위주로 책을 진열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곳을 찾은 최유경(28·여)씨는 이곳 특유의 따뜻함과 아늑함이 좋아 종종 찾는다고 했다. 최씨는 “무조건 책만 많이 갖다 놓는 것이 아니라 방향성과 지향성이 있는 서점이라 좋다”고 말했다.

용산구 해방촌 ‘고요서사’도 비슷한 성격의 책방이다. 3평 남짓한 공간에 책상 서너 개가 전부다. 개인 서재에 가깝다. 2015년 4월 문을 연 이곳은 주인이 직접 고른 소설책이나 시집으로 꾸며져 있다. 주로 독립출판물을 취급하는 것이 특징이다.

한 분야에 특화돼 ‘취향 저격’에 최적화한 책방들도 있다. 종로구 ‘더북소사이어티’가 대표적이다. 벽면을 둘러싼 책장에는 디자인이나 건축, 사진 등 예술 관련 서적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손바닥만한 책부터 얼굴 전체를 가릴 정도로 큰 잡지까지 크기도 각양각색이다. 주인 임경용(42’씨는 과거 영화예술 서적을 만드는 출판사를 운영했다. 여기서 만들어지는 책들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생각에 7년 전 ‘더북소사이어티’를 열게 됐다. 단골손님 박민정(30·여)씨는 “교보문고 같은 대형서점에는 없는 디자인이나 독립잡지가 많아서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입소문이 난 곳”이라고 귀띔했다.

과학서적만 공략하는 책방도 있다. 용산구 ‘북파크’는 과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안성맞춤이다. 책방에는 천체망원경도 놓여 있어 직접 체험해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식물이나 건축 관련 서적도 갖추고 있다.

건축학을 전공하고 있는 김혜인(25·여)씨는 이곳에서 과학전문잡지 ‘스켑틱’과 건축 서적 ‘건축 고전의 언어’를 구매했다. 김씨는 “대형서점에서는 이런 책을 찾기 힘들다. 대형 서점은 어딜 가든 인테리어가 같은데 독립서점은 이와 달라 매력 있는 것 같다”며 만족해했다.

옛날 책방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책방도 인기다. 용산구 인근 ‘디스레트로라이프’가 그렇다. 책방의 두 벽면을 차지한 책장에는 주로 90년대 이전 출판된 책들이 꽂혀 있다. ‘로미오와 쥬리엣’ 따위의 구식 표기법으로 쓰인 책들이 눈에 띈다. 이제는 절판돼 찾을 수 없는 책들도 많다.

주인인 남승민(40)씨는 ‘옛날 것’ 찬양론자다. 옛날 책을 모으는 이유에 대해 그는 “그 시절 만들어진 것들에 대한 향수 때문”이라고 답했다. 주로 중장년층의 손님들이 결혼하거나 독립하면서 이사할 때 버렸던 책들이 아쉬워 이곳을 종종 찾는다고 한다. 단골손님 중 교수나 비평가, 번역가들도 꽤 된다.

남씨는 책방 한쪽에 걸린 오래된 시계를 가리키며 “내가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아직도 이런 게 좋다”며 웃어 보였다.

글·사진=이가현 이재연 권중혁 기자 hyun@kmib.co.kr, 그래픽=안지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