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명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남성 중심의 전쟁 서사 아래 가려져 기억되지 않던 여성 참전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다. 전쟁의 포화는 많은 것을 파괴하고 감춘다. 삶과 죽음의 참혹한 경계에 내던져진 소년소녀의 앳된 얼굴만큼 아픈 것이 또 있을까. 작고 연약한 이들의 이름도 대부분 숨겨지고 지워져 버린다. 연합군의 포로가 된 나치 독일 군대의 십대 소년 병사들의 경우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6일 개봉한 덴마크 영화 ‘랜드 오브 마인’(감독 마틴 잔드블리엣)은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을 보여준다. 1945년 5월 덴마크를 5년간 점령했던 독일군이 퇴각한 뒤 연합군은 해변에 그들이 매설해놓은 250만여 개의 지뢰를 제거하기 위해 2000여 명의 전쟁포로를 강제 투입했다. 이들은 대부분 15∼20세의 소년병이었다. 지뢰를 해체하다가 팔다리가 잘리면 엄마를 찾으며 우는 소년들이었던 것이다.
영화의 덴마크어 원제는 ‘모래 밑’이다. 모래 아래에는 지뢰만이 아니라, 어린 전쟁포로들에 대한 가혹행위의 역사가 오랫동안 묻혀져 있었다. 프랑스어로 번역된 제목 ‘잊혀진 자들’은 이러한 함의를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
영화는 퇴각하는 독일군들을 바라보는 칼 라스무센 중사가 거칠게 내뱉는 숨소리로 시작한다. 나치 치하에서 고통받았던 그는 어린 포로들에게 철저히 가학적인 행동으로 복수한다. 북해의 회색 바다, 부서질 듯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아름다운 모래 언덕과 넓은 해변은 소년병들에게 지붕 없는 끔찍한 감옥일 뿐이다. 소년병들은 굶주린 배로 엎드린 채 목숨을 걸고 지뢰를 찾아 해체해야 한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소년병은 근처에서 혼자 놀고 있는 꼬마 소녀가 빵 한 조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말을 건다. 인형이 다쳐 아프다는 소녀의 말에 그는 주머니에 있던 붕대 조각을 꺼내 인형 다리에 매어주며 말한다. “군인은 언제든 생명을 구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거든.” 전쟁 막바지에 징집되었다가 포로가 된 소년들에게 군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대부분 연기 경력이 없는 신인 배우들이지만 소년병의 순진함, 신체적 고통과 공포에 익숙해진 자 특유의 무표정,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은 천진난만함 등을 놀라울 만큼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무자비한 학대자에서 따뜻한 보호자로 변화하는 라스무센 중사 역의 롤랜드 뮐러의 탁월한 연기 또한 관객을 영화에 깊이 빠져들게 한다.
올해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 부문에 후보로 선정됐던 이 영화는 탄탄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잔드블리엣 감독은 증오에서 우정으로 변화해가는 인물들의 심리를 섬세한 터치로 그려내면서 드라마를 정공법으로 힘있게 전개한다. 지뢰 해체라는 주된 설정이 극의 초반부터 끝까지 서스펜스를 팽팽히 유지, 관객에게 한 순간도 몰입의 끈을 놓지 못하도록 만든다.
전쟁과 휴머니즘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도 감정 과잉의 멜로나 공포스런 이미지에 기대지 않는다는 점은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다. 여러 번의 지뢰 폭발이 일어나지만 한 장면을 제외하면 가까이에서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일반적인 전쟁영화와는 거리가 먼 작품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여금미 <영화학 박사>
[여금미의 시네마 패스워드-영화 ‘랜드 오브 마인’] 소년병사의 얼굴로 전쟁을 보다
입력 2017-04-10 0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