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장지영]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입력 2017-04-06 19:29

박근혜정부가 블랙리스트로 문화예술계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를 제외한 나머지 대선 후보들은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문화예술정책 기조를 천명했다.

문화예술계에서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흔히 ‘팔 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으로 불린다. 팔 길이 원칙은 원래 이해관계가 있을 수 있는 당사자 사이에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독립적인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조세와 규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용되는 이론이지만 문화정책 분야에서 가장 활발하게 사용된다.

문화예술계에서 팔 길이 원칙은 1946년 경제학자 존 케인스가 초대 위원장을 맡은 영국예술위원회가 기본 방침으로 내세우면서 일반화됐다. 케인스는 정부가 문화예술을 지원하되 대상자 선정 등은 예술계 전문가의 목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영국에서 정권교체와 상관없이 문화예술 지원은 예술위원회가 맡고 정부는 간섭하지 않는 팔 길이 원칙이 문화정책의 기본 토대가 됐다. 1995년 영국예술위원회가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위원회로 각각 나뉘었어도 이 원칙은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서는 1992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 후보가 팔 길이 원칙을 문화예술 분야 공약으로 처음 제시한 이후 노무현정부 시절인 2005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예술위)로 바뀌면서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예술위가 당시 잉글랜드 예술위원회를 참고해 만들어진 만큼 팔 길이 원칙은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에서도 금과옥조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출범 당시 민간 자율 기구였던 예술위는 몇 년 지나지 않아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산하 기관으로 슬그머니 되돌아갔다.

박근혜정부에서 예술위가 청와대와 문체부의 지시에 따라 블랙리스트를 가동한데서 알 수 있듯 우리나라에서 팔 길이 원칙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사실 영국에서조차 팔 길이 원칙은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 ‘팔 길이만큼 거리를 두지만 손은 대고 있다(arm’s length but hands on)’는 비판을 받는다. 심지어 팔 길이가 아니라 ‘손바닥 길이(palm’s length)’라는 비아냥을 사기도 한다. 이 때문에 영국에서는 2000년대 말부터 관료화되고 개혁이 불가능한 예술위원회를 아예 폐지하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한국에서도 예술위 무용론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대표적인 블랙리스트 실행 기관이었던 예술위가 지난 2월 중순 형식적인 사과문을 홈페이지에 올린 것은 무용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예술위에 대한 신뢰가 바닥에 떨어진 상황에서 사퇴하지 않는 박명진 위원장의 모습은 예술가들의 분노를 부채질하며 예술위의 존재 의미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예술위의 문예진흥기금 잔액은 내년 상반기에는 완전히 고갈된다. 2004년 말 5200여억원이던 것이 지난해 연말 813억원으로 대폭 감소했고 올해는 422억원 정도 될 것으로 추정된다. 대선 후보들이 앞다퉈 문예진흥기금 확충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예술계에서는 예술위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오는 5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지금과는 패러다임이 다른 문화예술정책이 나와야 한다. 예술 현장과는 동떨어진 행정을 펼쳐온 문체부와 예술위의 과감한 개혁이 필수적이다. 문화예술계의 발전을 가로막는 관료주의 타파, 그리고 문화예술 전문기관의 독립성 마련은 무엇보다 시급하다.

장지영 문화부 차장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