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영석] ‘섀도 청와대’를 오픈하라

입력 2017-04-06 19:30

‘왕실장’ ‘고독한 2인자’ ‘대통령의 그림자’ ‘복심’ ‘권부의 꽃’….

시대와 역할에 따라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붙여졌던 별칭들이다.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며 2인자의 권력을 향유한 이가 있었는가 하면 허울뿐인 비서실장으로 자리만 연명하다 떠난 이도 없지 않았다. 권력의 크기는 달랐어도 청와대 비서실장은 지근거리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핵심 참모라는 사실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 출범 당시엔 청와대 비서실장 직제가 없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비서실은 1급 비서관장 1명과 8명의 비서관으로 구성됐다. 비서실 역할은 단순 비서나 사무보조 역할에 국한됐다. 첫 비서관장은 김양천 전 경무대 서장이다. 이기붕 전 부통령은 비서관장으로 2인자의 위세를 떨치기도 했다. 1960년 윤보선 대통령이 경무대를 청와대로 개칭하면서 비서실도 공식 직제로 개편됐다. 비서실장과 대변인이라는 명칭도 이때 생겨났다. 비서실장에 오른 인물은 초대 이재항씨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38명(최광수 서리 체제 제외)이다. 2공화국 당시 14명에 불과했던 청와대 비서실은 계속 커지면서 노무현정부부턴 500명 시대를 이어가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이후락 비서실장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등에 업고 63년 비서실장이 되면서 비서실을 명실상부한 권부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부통령이란 별칭까지 붙기도 했다. 후임 김정렴 비서실장은 69년부터 무려 9년3개월간 역임했다. 깨지기 힘든 최장수 기록이다. 노무현정부에선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마지막 비서실장에 올랐다. 청와대 비서실장 출신이 대선 후보가 된 것은 처음이다. 박근혜정부에는 ‘기춘 대원군’ 김기춘 비서실장이 국정 농단의 또 다른 축에 서 있었다.

이처럼 청와대 비서실장은 평시에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더욱 그러하다. 차기 정부가 역대 최악의 상황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인수위원회도 없다. 국무총리와 정부 조직을 이끌 각 부 장관도 없다. 누가 되든 야당이 각료 임명에 반대하고 나선다면 국정 혼란 상태는 장기화될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차기 정부 초대 비서실장은 일시적으로 ‘비서실장+인수위원장+총리’ 역할까지 감당해야 할 판이다.

그런 탓에 대선 후보들이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인사는 총리가 아니라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비서실장은 인사청문회를 거치지 않기에 여론 검증의 시간도 없다. 또다시 ‘제2의 김기춘’을 만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는 말이다. 이를 막기 위해선 비서실장을 대선 전에 미리 공개하는 방안을 권하고 싶다. 숨가쁘게 변해가는 한반도 위기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국가안보실장도 사전 공개한다면 금상첨화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경제수석과 인사 검증을 위한 민정수석도 마찬가지다. ‘섀도 캐비닛(예비 내각)’ 공개보다 더욱 시급한 것이 ‘섀도 청와대’ 공개인 셈이다. 예측 가능한 정치를 위해서도 ‘섀도 청와대’ 공개가 바람직하다. 대선 후보를 판단하는 또 하나의 잣대도 될 수 있다.

비상시국인 만큼 차기 비서실장의 조건은 더욱 까다로워야 한다. 국정 장악력과 정책 전문성, 대통령과의 교감은 기본이다. 위기 국면을 헤쳐 나갈 추진력, 분열된 민심을 수습할 소통 능력까지 갖춰야 한다. 슈퍼맨급 비서실장이 필요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덕목은 ‘노(NO)’라고 말할 수 있느냐다. 대통령의 생각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기에 앞서 시중의 여론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인물이 등용돼야 한다. 제럴드 포드 전 미국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도널드 럼즈펠드는 말했다. “대통령에게 욕을 퍼붓는다고 생각할 정도의 용기가 없다면 그 자리에 있어선 안 된다.”

김영석 논설위원 y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