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채수일] 용납 못 할 형제자매는 없다

입력 2017-04-06 18:34

성(聖)과 속(俗)이라는 배제의 논리는 유대교의 음식 규정에만 있던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도 적용됐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에게 말합니다. “유대 사람으로서 이방 사람과 사귀거나 가까이하는 일이 불법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사람을 속되다거나 부정하다거나 하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행 10:28)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게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행 10:34∼36) 그렇습니다. 피부색과 인종과 언어와 성과 나이가 다르다고, 종교와 국적, 가치관과 신념이 다르다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적이지도 않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갈등이 고조되는 것을 염려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촛불’과 ‘태극기’ 집회에서 주장되는 것이 과연 ‘국론’인지도 의심스럽지만, 입장의 내용적 차이가 아니라 일부 시위자들의 태도를 보면 차마 국론이라고 이름 붙이기조차 부끄럽습니다. 아무튼 국민 여론이 분열돼 있는 것은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국론이 하나여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권위주의 국가나 독재체제에서는 오직 하나의 국론만이 있거나 오직 하나의 국론만 허용될 것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생각과 의견과 신념이 억압받지 않고 표현될 수 있어야 하고, 그런 차이가 생각이 다른 사람에 의해 폭력적으로 위협받지 않아야 하고, 공권력에 의해 탄압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생각이나 신념이 다른 사람을 존중(尊重)하는 것과 존경(尊敬)하는 것은 다릅니다. 전혀 다른 생각과 현실인식과 판단, 낯선 스타일을 가진 사람의 신념과 권리와 자유를 존중할 수는 있으나, 존경할 수는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타자에 대한 존중이 자신의 신념을 굽히거나 자기 생각을 정직하고 힘 있게 증언하지 않는 것과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무관심과 무시, 겉으로는 귀를 기울이는 것 같으나 속으로는 경멸하고 비웃는 것이 타자를 존중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기 때문에 생각과 행동이 다른 사람을 피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면서 대화에 나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착한 행실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드러나지 않은 것도, 언제까지나 감추어져 있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딤전 5:25).

문제는 교회 안에서도 현실을 판단하는 시각과 입장의 차이로 분열돼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의 다른 모든 단체들과 다른 점이 많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차이는 자격에 대한 규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조직이나 단체들은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교회만이 들어오는 데 자격 조건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우리가 그에 걸맞은 행실을 했거나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 외의 다른 자격 때문에 교회공동체 안에 받아들여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생각과 행동이 다른 형제자매들이 함께 있는 것을 용납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죄인인 우리를 먼저 용서하셨다는 것을 믿고, 감사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용납하지 못할 형제자매는 없습니다.

채수일 경동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