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현지시간으로 2017년 4월 5일 오후 5시 53분(한국시간 오후 6시 23분). 김일성경기장의 장내 아나운서가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관람자 여러분, 인디아 팀과 대한민국 팀 선수들이 입장하겠습니다.” 태극기가 인도 국기, 아시아축구연맹(AFC)기와 나란히 트랙을 빠져나가 그라운드에 세워졌다. 그리고 북한 축구의 성지로 불리는 김일성경기장에 처음으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이날 평양엔 아침부터 줄기차게 비가 내렸다. 그럼에도 앞서 열린 북한과 홍콩의 경기(북한 5대 0 승)에 1만3500여 명이 김일성경기장을 찾았다. 홈팀 경기가 끝난 뒤에도 비를 맞지 않는 관중석 상단에 5000여명이 남아 남한 축구팀이 사상 처음으로 평양에서 벌어지는 AFC 주관대회에서 경기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인도 국가가 울릴 때 기립한 사람들은 남측 국가가 연주될 때도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지난달 한·중전 때 터져 나온 야유 같은 것도 없었다. 조용히 그라운드를 지켜보며 예의를 다했다.
윤덕여 감독이 이끄는 한국 여자 축구 대표팀이 평양에서의 첫 경기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여자대표팀은 이날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2018 AFC 여자아시안컵 예선 B조 1차전에서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56위 인도를 맞아 10대 0 대승을 거뒀다.
강유미가 전반 11분 인도의 밀집수비를 뚫고 첫 골을 터뜨리며 분위기를 끌어올린 한국은 이민아의 추가골과 이금민의 연속골 등을 합쳐 전반에만 5-0으로 앞서나갔다. 이틀 전 북한이 인도를 8대 0으로 이겼기 때문에 ‘윤덕여호’는 남·북전에서 무승부를 이룰 경우 다득점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득점 뒤 한국 선수들은 볼을 갖고 하프라인으로 뛰어가 실점한 인도의 빠른 킥오프를 유도했다. 후반에도 한국은 5골을 넣으며 첫 테이프를 잘 끊었다. 이금민의 해트트릭을 비롯해 이민아 유영아 지소연 이은미 등이 골고루 득점했다.
킥오프 뒤 고요함 속에 경기를 관전하던 북측 관중은 숨겨놨던 ‘본심’을 서서히 드러냈다. 남·북이 한 장 뿐인 여자아시안컵 본선 티켓을 놓고 경쟁한다는 점도 염두에 둔 듯 인도를 응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뒤로 물러서서 수비만 하던 인도 선수들이 하프라인을 넘어 치고 나갈 때면 경기장이 서서히 시끄러워졌다. “(패스를)반대로”, “(앞으로)나가라”, “(상대 선수를)붙으라” 등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실력에서 너무 크게 뒤지다보니 인도 선수들은 곧 볼을 빼앗겼고, 그때마다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국 선수들이 인도 골망을 흔들 때마다 관중석에서 탄식이 흘러나왔지만 야유나 비난의 소리는 없었다. 전반전이 끝나며 승부가 사실상 결정된 뒤 많은 인파가 빠져나갔다. 그래도 2500명 가량이 끝까지 남조선에서 온 축구팀 경기를 지켜봤다. 후반 초반 인도 골키퍼가 같은 팀 선수의 백패스를 잡아 페널티지역 내 간접프리킥을 내줄 땐 “문지기가 멍청하구만”이라고 말하며 축구 지식을 펼치는 이도 있었다.
한국과 북한은 7일 오후 3시 30분 내년 여자아시안컵 본선은 물론, 2019년 프랑스 여자월드컵 본선 티켓까지 사실상 걸린 일전을 김일성경기장에서 벌인다.
2연승을 기록 중인 북한의 김광민 감독은 “한국전에 대해 “경기 전엔 (승부를) 예상할 수는 없다”며 “우리 선수들이 최대의 정신력을 발휘해 잘 싸울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평양=공동취재단
평양에 울려퍼진 애국가… 한국, 인도에 10-0 대승
입력 2017-04-05 18:12 수정 2017-04-05 2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