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2일 서울 관악구의 한 건물. 2층에 사는 김모(26)씨가 소리를 지르며 아래층 슈퍼로 뛰어 내려왔다. 반쯤 넋이 나간 모습으로 “아버지 좀 살려주세요”라고 외쳤다. 놀란 주민들이 달려가 보니 그의 아버지(59)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주민들은 소화기를 뿌리고 구급차를 불렀다. 그는 병원 호송 중 숨졌다.
아버지 김씨는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다. 아들과 둘이서 살던 김씨는 일용직으로 일했다. 술을 많이 마시곤 했지만 남에게 피해를 끼친 적은 없었다. 술 좀 줄이라고 누가 나무라면 “별거하는 마누라를 기다리느라 그렇다”고 짧게 대답하곤 했다. 주민들은 그가 왜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 아들과 말다툼이 잦았고, 그만큼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을 것이라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보다 이틀 앞선 20일에는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앞에서 이모(38)씨가 분신 소동을 벌였다. 그는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뿌리다가 국회 경호대에 제지를 당했다. 이씨는 충북에서 소를 키우던 농장 주인이었다. 소 값이 뚝 떨어져 사료 값 등 빚 독촉에 시달리다 소를 모두 팔았다. 그래도 빚을 다 갚을 수 없었다. 막막해진 이씨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신세를 호소하려고 국회 앞에서 자기 몸에 불을 대려 했다.
민주주의의 시대에도 억울하다고 분노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절벽까지 내몰리다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는 이들은 노동운동가나 신념에 불타는 이들이 아니라 평범함 이웃이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민주화 등 사회적 정의를 위해 희생하는 맥락에서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일이 벌어지는 경우가 있었지만 최근에는 불황, 불평등 심화로 개인적인 문제가 해결이 안 되자 극단적 방식으로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본보가 지난 6년간 발생한 분신(시도) 사건 98건을 분석해 보니 ‘억울한 사정’(29.5%) 때문에 마지막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 한 이들이 가장 많았다. 억울한 사정이란 임금을 체불당했거나 노조 가입을 이유로 회사에서 압박을 받았거나, 중소기업 사장이 대기업의 횡포에 시달리고 있었거나, 수사기관에서 부당한 대우를 당했다는 등의 사연이었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를 개인이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던 경우다. 생활고 등 경제적 문제는 17.3%로 두 번째였다. 우울증, 스트레스 등 정신적 이유(9.1%), 실연 등 애정 문제(9.1%), 정치 비판(7.1%), 가족 문제(7.1%) 등도 적지 않았다.
사회적인 의제를 던지던 과거의 분신과는 양상이 다르지만, 절망감과 절실함은 다르지 않다. 구 교수는 “우리 사회는 여전히 대화와 타협으로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이유를 설명했다. 김지호 경북대 심리학과 교수도 “삶에서 억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분신 자살·시도 당시 연령은 40대, 50대가 각각 32.6%로 가장 많았다. 성별로는 남성이 89.7%로 월등히 많았다. 사회적으로 가장 큰 책임을 짊어진 중·장년층 남성이 해결책을 찾지 못해 내몰린 셈이다. 노진철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열심히 살아왔지만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 일종의 저항을 담은 사회적 현상”이라며 “실질적 삶과 깊게 연관된 문제”라고 말했다.
정부가 국민이 겪고 있는 고통에 더 민감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왔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권위의 실종, 정치적 무능으로 국민은 막막함을 느낀다”며 “국민의 고통에 더 민감한 정권을 만들어 국민 눈높이에 만든 정치를 펼칠 수 있도록 권력 구조를 개편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전명수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분신이라는 극단적 수단을 택하기 전에 권력과 대화가 가능하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며 “정권이 대중과 소통하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글=최예슬 기자 smarty@kmib.co.kr, 그래픽=공희정 기자
[기획] 권력 저항에서 개인 좌절로 넘어간 ‘분신의 이유’
입력 2017-04-05 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