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키소스(Narcissus). 수많은 처녀와 요정의 구애에 눈길 한번 주지 않던 그리스 신화 속 미소년이다. 숲과 샘의 요정인 에코는 헤라의 괘씸죄에 걸려 스스로 아무 말 못하면서 남의 말만 반복하는 저주를 받았다. 미소년 나르키소스를 사랑했던 에코는 말 한마디 못해보고 구애를 거절당하자 슬픔 속에 야위어 메아리만 남게 됐다.
정의로운 복수의 신 네메시스는 에코의 사랑을 저버린 나르키소스에게 저주를 내린다. 헬리콘산에서 사냥을 하던 나르키소스는 목이 말라 샘으로 다가갔다가 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랑하게 되어 한 발짝도 떠나지 못하고 샘만 들여다보다가 빠져 죽었다. 자신 말고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게 된 그는 죽어 수선화로 변했다. 자기애나 자아도취를 뜻하는 ‘나르시시즘’의 유래다. 나르키소스의 운명은 비극적이지만 아무것도 대체할 수 없는 그의 수려함은 수선화로 다시 피어났다.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의 ‘유기방 가옥’은 요즘 노란 수선화들로 꽃대궐을 이룬다. 고택의 자태도 단아하지만, 수선화와 어우러진 모습은 더욱 빼어나다. 절반 정도 피어난 꽃들이 4월 중하순까지는 주변을 온통 노란 빛으로 물들일 터다. 지금 이 모습을 못 보면 또 한 해를 기다려야 한다.
먼저 고택 뒤쪽에 자리잡은 야트막한 동산에 올랐다. 그곳은 온통 노란 물결이다. 유기방씨가 17년 전부터 조성해온 6600여㎡ 규모의 정원에 수선화가 절반 이상 피어 있다. 그 속을 거닐면 몸에도 마음에도 노란 물이 들 지경이다. 엄마 손을 잡고 노란 꽃을 신기한 듯 들여다보는 어린 아기의 마음 속에 꽃향기가 노랗게 퍼질 것이다.
고택 사랑채 뒷담의 홍매화·산수유와 어울려 한 폭의 수채화를 펼쳐놓는다. 사진 찍기 좋은 포인트(포토존)에 의자도 놓여 있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어머니를 앉혀놓고 사진을 찍는 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고택 너머로 여미리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꽃밭 위쪽으로 소나무가 수직세상을 이루고 있다. 꽃이 피어있지 않은 계절에 와서 소나무가 빽빽한 솔숲길을 천천히 걸으며 산림욕을 즐겨도 그만이다. 바람 따라 어디선가 솔향이 기분을 한결 가볍게 해준다.
유기방 가옥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양반가옥으로 향토사적·건축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충남도 민속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됐다. 얕은 야산을 뒤에 두고 남향으로 1900년대 초에 건립돼 100년을 넘었다. 드라마 ‘직장의 신’에서 옹자염 생산자인 옹아집 옹의 집으로 나왔던 곳이다. 면적은 4770㎡로 현재에도 후손들이 살고 있다.
안채는 ‘ㅡ’자형으로 부엌, 방, 대청마루, 건넛방으로 구성돼 있고 사랑채가 사잇담을 두고 행랑채와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들문을 설치해 필요시 사랑방에서 마루까지 한공간으로 개방할 수 있도록 했다. 동측에는 안채와의 사잇담과 근래에 지은 주택이 안마당을 형성하고 있다. 문고리, 창살문에는 우리 전통의 멋이 그대로 살아 있고, 안채 대청마루에는 주인들의 사진 등이 걸려 있다.
원래 안채 앞에 중문채가 있던 것을 1988년 헐어내고 현재와 같이 누각형 대문채를 건립했다 한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아닌 안채가 나오는 점이 특이하다. 또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인 사랑채보다 크다.
후면 담장은 급한 경사지를 따라 U자 모양으로 둥글게 감싸고 있으며 상부에 연목을 놓고 기와를 얹은 토담이다. 굴뚝은 항아리 모양이다. 고택 앞에는 못이 두 개 있다.
고택 앞 주막집 형태의 식당 뒤편 능선에 올라서면 수령 300년을 훌쩍 넘긴 보호수 ‘여미리 비자나무’가 있다. 충남도 기념물 174호다. 조선 숙종 때 여미 출신인 입향조 이창주의 증손으로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이택(李澤·1651∼1719)이 1675년 제주도의 비자나무를 가져와 심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세 그루를 심었는데 두 그루는 죽고 한 그루만 남아 1982년 10월 16일 운산면 나무로 지정됐다. 둘레 246㎝, 높이 20m다. 비자나무는 산림학적으로 중요한 자료다. 대체로 전라도의 백양산과 내장산에 자생하고, 제주도에 대군락을 이루고 있는 수종으로 중부지방 이북에는 잘 자라지 않아 그 수가 드물다.
유기방씨는 “수선화는 생명력이 강하고 번식력이 뛰어나 관상용으로 심기 좋다”며 “서산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모두 수선화, 소나무, 고택 등이 어우러진 모습을 보고 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유기방 가옥 앞에 해태상 한 쌍이 있다. ‘서산아라메길’의 출발점이다. 바다의 고유어인 ‘아라’와 산의 우리말인 ‘메’를 합쳐 서산의 아름다운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을 함께 둘러볼 수 있는 길이다. 1구간은 역사 유적지와 계곡, 산으로 이뤄진 친환경 트레킹 코스로 전라산·용현리 등을 거쳐 해미읍성에 이르는 20.1㎞ 구간이다.
6구간은 서산시 부석면의 ‘달을 보는’ 서해의 작은 섬 간월도(看月島)와 연결된 해변길이다. 간월도가 온전한 섬이었던 것은 1984년 천수만방조제사업 이전이다. 지금은 하루 두 번씩 썰물 때 육지와 연결된다. 썰물로 바닷물이 멀리 물러나면 갯벌에 사람들이 하나 둘 채운다. 소라, 고동, 방게가 지천이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신난다. 뭍에서 바라보는 일몰 풍광이 장관이다. 섬 인근 천수만은 철새들의 고향이다.
여행메모
647번 지방도 벚꽃·해미읍성… 볼거리 풍성
간월도 최고 음식 어리굴젓·영양굴밥 ‘별미’
충남 서산의 유기방 가옥에 가려면 서해안고속도로 서산나들목에서 빠지는 것이 좋다. 운산면 방향으로 우회전해서 약 2.5㎞ 지점에 있다. 이곳에서 간월도로 가려면 고속도로나 국도를 이용해도 좋지만 647번 지방도로를 타고 갈 것을 권한다. 지나는 길에 해미읍성이 있다. 또 운산에서 해미읍성 중간에 황금빛 소떼가 ‘한국의 알프스’를 연출하는 서산목장이 있다. 4월 중순쯤 목장길을 따라 수령 30년의 벚나무 1000여 그루가 초록색 목초밭을 배경으로 벚꽃터널을 이룬다. 간월도로 직접 가려면 홍성나들목이 가깝다. 서산A지구 방조제까지 13㎞ 정도 가면 된다.
간월도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은 어리굴젓과 영양굴밥이다. 어리굴젓은 수백년 동안 이곳 지역민들이 먹은 토속음식이다. 보통 젓갈보다 훨씬 적은 20% 정도의 소금을 넣어 발효시켜 매콤하면서도 톡 쏘는 뒷맛이 일품이다. 조선시대에는 진상품으로 임금님 수라상에 올랐다. 간월도 입구에 어리굴젓기념탑이 우뚝 서 있다.
은행, 호두, 대추 등을 넣어 많든 영양굴밥에 어리굴젓을 얹어 먹는 맛이 그만이다. 간월도 바다횟집(041-664-7821)은 싱싱한 자연산 회로 유명하다.
팔봉산 인근에는 펜션과 민박이 많다. 용현자연휴양림(041-664-1971), 윈체스트콘도(041-666-8800), 간월민박(041-662-0895), 천수만민박(041-663-7572), 벌천포민박(041-669-5827) 등을 이용해도 좋다.
서산=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 그래픽=박동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