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본선 직행’을 확정한 안철수 전 국민의당 공동대표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의사에서 컴퓨터바이러스 백신을 만드는 벤처사업가로 변신했고, 청년들의 아픔을 공유하던 ‘청춘 멘토’에서 제3정당을 이끄는 유력 정치 지도자로 성장했다. 2012년 대선 레이스에서 중도 낙마하며 현실정치의 벽을 절감했던 그는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 대세론’에 맞설 국민의당 대선 후보로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20대 청년 안철수는 장래가 촉망되는 의사였다. 1962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그는 3살 때 부산으로 이사해 학창시절을 보냈다. 이후 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1980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고, 불과 28세에 단국대 의대 학과장을 맡았다. 하지만 그는 의사보다 컴퓨터바이러스 전문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995년 안철수연구소(안랩)를 창립해 벤처사업가의 길을 걸었다. 일반 국민들에게 백신 ‘V3’를 무료로 배포하며 기업가 정신의 진면목을 보여준 리더로 평가받았다.
성공한 벤처사업가로 활동하던 안 후보에게 2011년은 터닝포인트였다. ‘시골의사’ 박경철 원장 등과 전국을 누비며 ‘청춘 콘서트’를 열었다. 청년실업과 자살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시점에 ‘공감’과 ‘힐링’으로 반향을 일으켰다. ‘안철수 신드롬’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그의 행보는 새로운 리더십의 표본으로 각광받았다. 안 후보는 이때 느낀 청년들의 아픔이 정치 입문의 밑거름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최근 국민의당 경선 TV토론 때도 ‘내 인생의 사진’으로 2011년 충남대에서 열린 청춘 콘서트 사진을 들고 나왔다. 안 후보는 “청년의 아픔을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에 정치를 시작했다”며 “초심을 돌아보게 하는 사진”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현실정치의 벽은 높았다. 안 후보는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영광과 좌절을 동시에 맛봤다. ‘새 정치’를 기치로 대선 출마를 선언해 여론의 뜨거운 지지를 얻었지만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의 단일화 과정에서 야권 대선 후보 자리를 전격 양보한다. 이때 얻은 ‘철수 정치’ 이미지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며 안 후보의 리더십에 대한 기대감도 점점 사라졌다.
이후에도 순탄치 않은 여정이 계속됐다. 2013년 재·보궐 선거를 통해 국회에 입성한 뒤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 자리까지 올랐지만 당 혁신 노선을 놓고 친문(친문재인) 세력과의 갈등 끝에 대표직을 사퇴했다. 2015년 말에는 “당 안에서 변화와 혁신은 불가능하다. 정권교체를 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만들겠다”며 탈당을 결행한다.
혈혈단신으로 ‘광야’에 선 그는 지난해 4·13총선을 앞두고 야권 통합론의 거센 압박을 받으며 다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광야에서 죽어도 좋다”며 모든 연대론을 거부하고 독자 노선을 고수했다. 안 후보의 지휘 아래 10% 초반의 정당지지율에 그쳤던 국민의당은 ‘녹색 돌풍’을 일으키며 의석 39석의 제3정당체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안 후보는 경선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믿어야 국민도 믿어준다”며 4·13총선 때처럼 ‘자강론’을 다시 내걸고 출사표를 던졌다. 경선에서 손학규 전 국민주권개혁회의 의장, 박주선 국회부의장 등 경쟁자들을 압도한 그는 “안철수의 시간이 시작됐다”고 선언했다.
글=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 사진=이병주 기자
安풍, 强풍되나… 의사 → 벤처사업가 → 청춘 멘토 → 정치 지도자 → ?
입력 2017-04-04 17:45 수정 2017-04-04 2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