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시선과 채널이 고정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혹등고래의 세계가 그랬다. 어린 귀신고래 한 마리가 범고래 무리에게 쫓기는 걸 보고, 혹등고래들이 보호자로 나섰다. 먹이 다툼이 아니었는데도 범고래와 대신 싸우면서 말이다. 혹등고래를 움직인 동기는 공감능력이었다. 다른 이유라는 말도 있지만, 나는 그 해석을 좋아한다. 혹등고래가 여린 동물을 자신의 몸 위에 올리고, 한 척의 배가 되어 흘러가는 과정을 보면 부끄러워지니까.
고래를 닮았던 배 한 척이 마침내 올라왔다. 한 척의 배를 심해어로 여길 만큼 긴 시간이 걸렸다. 인간이 배를 끌어올린 것이 아니라 바닷물이 다 빠져나가 마침내 배를 보여준 느낌이 들 만큼 우리는 재난 이후에 서툴렀다. 재난이 드문 사회가 아닌데도 여전히 서툰 건 우리 사회의 공감능력 부족 때문이다. 거대한 단전(斷電)이랄까. 전력이 끊기면 복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무언가가 함몰되어도 내버려둔다. 방치하다 기억마저 단전되기를 기다리듯, 블랙아웃을 또 다른 블랙아웃으로 돌려막기하듯. 정작 중요한 건 충분한 애도인데, 공감능력이 부족하면 애도에 인색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애도에 얼마나 인색한지를 뉴욕의 911메모리얼에서 느꼈다. 화면의 낯선 이름과 사진을 손가락으로 누르니 무너진 건물의 보험회사에서 일하던 여자가 등장했다. 그녀의 어린 시절, 졸업, 파티, 데이트, 그 삶의 기록을 읽으니 마치 가까운 사람인 것 같았다. 그 공간이 인상적이었던 건 최대한 섬세하게, 개체 하나하나를 기억한다는 느낌을 받아서였다. 어떤 사람들은 애도하는 행위에도 유효기간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슬픔조차 가판대 위에 주저앉은 재고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슬픔이야말로 사회 구성원들이 가슴을 맞대고 계속 얘기해야 할 주제다. 슬픔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곧 그 사회의 건강상태를 가늠하는 지표가 된다. 상처를 어떻게 봉합하는지를 보면 그 사회가 어떻게 나아갈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글=윤고은(소설가), 삽화=공희정 기자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애도의 유효기간
입력 2017-04-04 17: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