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북정책은 1993년 ‘1차 북핵 위기’ 이후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 북한은 빌 클린턴 미 행정부 출범 두 달밖에 지나지 않은 93년 3월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며 긴장을 고조시켰다. 북한이 이듬해 폐연료봉을 무단 인출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까지 탈퇴하자 미국은 ‘영변 폭격’이라는 초강수를 검토했다. 상황은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 방북 이후 급변해 같은 해 10월 양국은 제네바 합의에 도달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즉각적인 핵 폐기보다 NPT와 IAEA 사찰을 통한 핵 동결에 주력했다. 매년 중유 50만t 제공과 경수로 건설을 약속했다. 이후에도 경제제재 완화 조치, 미사일 협상, 4자 회담 등을 통해 한반도 긴장 완화를 추진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조명록 차수가 서로 평양과 워싱턴을 교차 방문하고,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 방문까지 추진하는 등 관계 개선에도 적극적이었다.
반면 네오콘이 포진한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ABC(Anything But Clinton) 정책’은 대북정책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취임 첫해인 2001년 9·11테러까지 겹치면서 북한에 대한 미국의 인식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부시 행정부는 2002년 신년 연설에서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하며 강경대응을 예고했다. ‘2차 북핵 위기’가 불거진 후에는 중유 공급 중단 등 제네바 합의를 사실상 폐기했다. 북핵 문제에 대해서도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폐기(CVID)’를 주장하며 고자세를 유지했다.
미국의 대북 강경노선은 6자 회담이 재개되면서 완화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 이후엔 아예 방향을 전환했다. 북·미 양자회담에 응하고 대북 금융제재도 해제했다. 2007년엔 북핵시설 폐쇄·봉인, 불능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2·13합의도 도출했다. 대북 중유 공급을 재개하고,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했다. 하지만 이후 핵시설 검증문제를 놓고 북한과 대립하며 북핵 문제는 다시 교착상태에 빠졌다.
2009년 닻을 올린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초기 북한과의 대화 의지를 적극적으로 내비쳤다. 하지만 북한은 그해 4월 장거리 로켓 은하 2호 발사, 5월 2차 핵실험으로 화답했다. ‘핵무기 없는 세계’를 내걸었던 오바마 대통령은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로 자물쇠를 걸어 잠근다. 북한의 변화 전까지 제재로 압박하겠다는 전략적 인내 정책은 오바마 2기 행정부까지 이어졌다. 그 사이 북한은 3∼5차 핵실험 및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술 고도화를 지속했다.
김현길 조성은 기자 hgkim@kmib.co.kr
과거 美 대북정책은… 클린턴, NPT·IAEA 사찰 통한 핵 동결에 주력
입력 2017-04-03 1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