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모든 것을 다 보고 들을 수는 없다. 인식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욕구와 경험, 기타 개인적 특성에 따라 선택해 듣거나 본다.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수용하고 그 밖의 정보는 무시한다. 이런 현상을 ‘선택적 지각(Selective Perception)’이라 한다. 요로 다케시 도쿄의대 명예교수는 이러한 현상을 소개한 ‘바보의 벽’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기 싫은 말은 전혀 듣지 않는 현상을 바보의 벽이라 표현한 것은 참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에 대한 성부 하나님의 소리가 하늘에서 들렸을 때 어떤 이들은 천둥이 친 것이라 했고, 어떤 사람들은 천사가 예수님께 말한 것이라 전했다(12:29). 그들의 귀에 들린 것은 동일한 소리였다. 왜 같은 소리를 다르게 들었을까. 이 사람들은 귀로만 들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존재 전부로 들었다. 자신의 방식대로 소리를 선택하고 해석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예수님의 말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요 8:43) 들을 수 없다는 말은 귀와 청력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의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인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엇을 듣고 어떻게 듣는가는 사람됨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선택해서 듣기 때문에 무엇을 듣는가는 마음을 두고 있는 것, 얻고자 애쓰고 있는 것에 의해 좌우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막 4:24)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눅 8:18)
무엇을 어떻게 듣는가는 곧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내가 듣는 것이 곧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곧 우리 자신에 대한 판단일 수 있다. 무엇인가를 들을 때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것들을 갖고 듣기 때문이다. 단지 육체의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사랑과 미움, 편견과 선입견, 원한과 혐오 등을 갖고 듣는다.
천한 삶을 사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천하게 들을 것이고, 숭고한 삶을 사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숭고하게 들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논리로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그러나 그 논리를 움직이는 심리가 있다. 심리가 논리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사회의 혼란은 논리 위에 심리가 더 크게 작용할 때 일어난다. 양극단으로 치우친 판단은 언제나 심리가 논리를 짓누르고 이길 때 일어난다. 사회적 성숙이란 각자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주장을 내려놓고 객관적 증거와 논리를 두루 살핀 후 심리가 그 증거를 따라갈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앙생활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심리가 논리를 짓누르는 경우가 발생한다.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논리를 무시하고 자신의 소원에 맞는 말씀만 선택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이다. 자신이 믿고 싶은 심리대로 논리를 짜 맞추는 것이다. 참된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의 논리 앞에 자신의 심리를 무릎 꿇는 것이다.
믿음은 심리가 아니라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논리에 의지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증거에 대한 확신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의 성숙은 구성원들의 판단을 논리에 합당하게 객관화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말씀의 논리와 객관적 증거의 논리에 심리를 따르게 하는가에 달려있는 것이다.
듣고 싶은 말만 듣지 않고 듣기 싫은 말들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는가,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만 가까이하지 않고 듣기 싫은 말을 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진심으로 존중하고 가까이하는가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개혁은 심리가 논리를 지배하려는 행위를 포기할 때 일어난다.
이재훈(온누리교회 목사)
[시온의 소리] 심리와 논리
입력 2017-04-04 0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