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입력 2017-04-03 00:02
지난 1월 9일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1000일 추모 음악회에서 세월호 가족들로 이뤄진 합창단이 무대에 섰다. 합창단이 노래를 마친 뒤 전명선(가운데) 4.16가족협의회 위원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시스
19세기 독일 낭만파 시인 프리드리히 뤼케르트는 다작(多作)으로 유명했다. “나는 시를 쓰지 않고는 생각이란 것을 할 수가 없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과 생각을 시적 형상으로 완성했다. 9남1녀의 아버지였던 그는 지극히 가정적인 가장이어서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시도 다수 썼다.

생전의 왕성한 창작과 연구활동, 그리고 푸근하고 온화한 그의 시풍은 작가의 낙천적인 삶을 가늠케 한다. 그런데 1866년 뤼케르트가 사망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다수의 미발표 시가 발견됐다. 1833년 뤼케르트의 막내딸 루이스와 막내아들 에른스트가 디프테리아에 감염돼 보름간격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아이들을 잃은 상심 속에 그가 무려 425편의 시를 써서 감춰놨던 것이다. 뤼케르트 사후 이 시들은 그의 열두 권의 전집 중 일부로 출판돼 세상에 알려졌다.

이 시집은 당시 승승장구 중이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손에도 전해졌다. 1인칭 시점으로 자신의 내적인 슬픔을 고백하는 뤼케르트의 시는 음악가에게 한층 더 사무치게 다가왔다. 말러 또한 어린 시절 부모와 형제들의 연이은 죽음을 경험했고, 게다가 뤼케르트의 죽은 아들 에른스트는 말러가 10대 시절 병으로 떠나보낸 아끼던 동생과 이름이 같았다.

말러는 수백 편이 넘는 시들 중 다섯 개를 추려 이를 가사로 한 연가곡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를 발표했다. 이 노래들은 작곡가로서의 재능을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지만 말러에게 평생 후회로 남았다. 이후 알마와 결혼해서 얻은 첫 딸 안나 마리아를 다섯 살도 채 되기 전 뤼케르트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디프테리아로 잃었기 때문이다. 말러는 자신의 연가곡이 딸의 죽음을 불러왔다고 자책했다. ‘죽음’에 심한 강박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딸의 죽음을 담담하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말러는 이렇게 고백했다. “당시 아이가 진짜로 죽었다면 그런 노래를 작곡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이런 말러의 심정은 425편이나 되는 ‘상심’의 시를 써놓고도 서랍 속에 감춰둔 아버지 뤼케르트의 그것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말러가 차용한 뤼케르트의 시는 아이를 잃은 부모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아이들은 잠시 밖에 놀러나갔을 뿐이라고/아이들은 곧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날씨는 화창하고, 불안해 할 것 없다고.”

자식의 죽음을 직시하지 못하는 부모의 노래는 실은 떠나간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다.

“신의 보호를 받으며, 아이들은 엄마의 집안에서처럼 편안히 쉬고 있다”는 이 연가곡의 마지막 가사로 위안을 얻는 것은 떠나간 아이들이 아닌 남아있는 부모들이다. 때문에 레퀴엠(진혼곡)은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를 위한 노래다.

아이들의 죽음 앞에서 오랜 시간 말문이 막혔던 우리들의 입에서 그들을 기리는 노래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세월호 추모 음악회가 열리고 음반이 제작되고, 지난 1월에는 아이를 잃은 부모들이 직접 무대에 서서 아이들을 떠나보내는 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노래에 멈췄던 시간이 흐르고 바다로 놀러나간 아이들이 마침내 뭍으로 돌아왔다. 말러의 가곡이 노래하듯, 비록 “우리 천막의 작은 등불”은 꺼졌지만 밤을 마음 속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이제 “영원한 (진실의) 빛 속”에 그 어둠을 침잠시켜야 할 때다. 노승림(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