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여행지에서 내 눈을 잡아채가는 장면이 조금씩 달라졌다. 부끄럽지만 젊은 시절의 나는 밀라노 두오모 대성당보다 그 옆의 빅토리오 엠마누엘 갤러리아에 진열된 명품에 더 감동했다.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사랑하게 된 후에는 그의 그림이 여럿 전시되어 있는 런던 테이트모던에서 여행지에서의 귀한 시간을 다 써버리기도 했다. 중년이 되어서는 인간 존재를 초라하게 만드는 자연 광경이 내 마음을 홀렸다. 스웨덴 스타방게르의 프라이게스톨렌에 올랐을 때는 겁 많고 소심한 내가 350m의 낭떠러지 아래로 짙은 하늘파란색 스카프처럼 피오르를 감아 흐르는 물길을 수직으로 내려다보고 싶어 절벽 끝까지 걸어갔다.
그런데 요즘은 사람이 좋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의 모습에서 감동을 받는다. 화려한 옷차림이나 아름답고 늘씬한 여성에게 끌린다는 말이 아니다. 길가에서 누구나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업실에서 무언가를 집중해서 만들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된다. 누군가는 기타를 만들고, 누군가는 목걸이를 만들고, 누군가는 바느질을 하고, 누군가는 고기를 다듬고 있다. 실례를 무릅쓰고 사진을 찍고, 인사말도 건넨다. 나는 메이커라고 불릴 수 있는 이런 사람에게 무한한 매력을 느낀다. 속물처럼 느껴지지만 예전에는 최신 유행 브랜드의 상품을 메이커라고 불렀고, 그걸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화려한 말로 세상을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고 웅변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들지 않고, 기발한 아이디어만 있으면 다 될 것처럼 흥분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진짜 좋은 물건을 만들기 위해 정성과 시간을 쏟아붓지 않고,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광고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 세상이 되었다.
말과 생각만으로 세상이 풍요로워질 수 없다. 이만큼 살만해진 것도 묵묵히 손과 발을 움직여 세상에 없던 무언가를 만든 메이커들 덕택이다. 그럴듯한 말로 자기를 치장하는 사람을 보면 묻고 싶어진다. “당신이 몸을 써서 만들어낸 건 무엇인가요. 그걸 보여주세요”라고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나도 말로 먹고 사는 사람이다. 더 겸손해지고 몸을 더 낮춰야겠다.
김병수(정신과 전문의)
[감성노트] 사람 여행
입력 2017-03-31 1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