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된 하루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이어폰을 꽂는다. 음악 대신 유튜브에서 ASMR 동영상을 찾는다. '바스락, 바스락….' 귀를 파고드는 소리가 손가락으로 등을 간질이듯 기분이 좋다. 회사원 강모(27·여)씨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듣는데, ASMR 영상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면 편안해진다. 간질간질한 '기분 좋음'을 느끼고 싶어 습관처럼 찾는다"고 말했다.
ASMR, 아직도 모르시나요
최근 몇 년 새 ‘새로운 문화’로 차츰 전파되던 ASMR이 어엿한 1인 미디어 콘텐츠로 자리를 잡았다. 30일 현재 유튜브에서 ‘ASMR’을 검색하면 700만건 가까운 영상이 조회된다. 지난해 6월 400만개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2013년부터 ASMR 영상을 만들어온 박다함(23·유튜브 닉네임 ‘데이나’)씨의 유튜브 채널 구독자는 40만명에 육박한다. 해외의 유명 ASMR 채널 ‘젠틀 위스퍼링’이 90만명 구독자를 가진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숫자다.
유튜브에는 청각을 이용한 ASMR이 대부분이다. 연필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 머리 빗는 소리, 라텍스 장갑을 구기는 소리, 젤리 먹는 소리, 키보드 타이핑 소리, 귀 파는 소리, 나뭇잎을 쓰다듬는 소리…. 45분간 오로지 비누만 깎기도 한다. ‘귀 청소’는 ASMR의 대표 장르가 됐다. 이비인후과에 온 듯 역할극을 더한 콘셉트가 인기를 얻고 있다. 속삭임 같은 말소리가 들어가지 않은 영상에는 ‘노토킹(NoTalking)’이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ASMR 영상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사람을 ‘ASMR 아티스트’라고 부른다. 이들은 적게는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수천만원대 장비를 보유하고 있다. 귀 모양이 양쪽으로 달려 있는 3D 마이크, 사람 머리 모양을 구현한 더미헤드 마이크는 ASMR 이용자에게 낯설지 않은 장비다. 더 생생한 소리를 위해 피부관리숍 등에서 실제 상황을 촬영하는 이도 적지 않다.
소리로 말하는 광고… ASMR 마케팅
ASMR은 광고와 마케팅에도 스며들고 있다. 제품의 소리로 식욕을 자극하는 광고가 대표적이다. 풀무원은 최근 만화가 김풍을 모델로 ‘라면 ASMR’을 만들었다. 라면을 ‘후루룩’ 들이키는 소리뿐 아니라 요리하는 모든 과정의 소리를 담았다. 지난해 12월 공개된 화장품 브랜드 이니스프리 광고는 오로지 크림이 피부에 밀착되는 소리만 담아 집중도를 높이기도 했다.
아이돌 가수가 침대에 누워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팬과 소통하는 네이버 ‘눕방’은 ASMR의 또 다른 버전이다. 아늑한 분위기에서 마치 스타와 단둘이 이야기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대선 경선 후보인 최성 고양시장은 정치인 최초로 ASMR에 도전했다. 지난 14일 공개된 홍보영상에서 최 시장은 여러 가지 ‘먹는 소리’를 선보이며 “생수 같은 대통령이 되겠다”고 속삭였다.
ASMR 연구는 ‘현재 진행형’
ASMR 이용자들은 특정 소리에 소름이 돋으며 기분이 좋아지는 순간을 ‘팅글’이라고 말한다. 2015년 영국 스완지대학에서 500명을 대상으로 ASMR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결과 사람들은 ASMR을 들으며 팅글을 인지할 때 두피 뒤쪽이나 척추의 선을 따라 또는 어깨 뒤쪽으로 어떤 느낌을 받았다고 응답했다. 또 응답자 80%가 ASMR을 듣고 “기분이 좋아졌다”고 답했다.
ASMR의 효과나 팅글에 대한 과학적 근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크레이그 리처드 미국 셰넌도어대 교수는 ‘ASMR 대학’이라는 사이트를 통해 2014년 8월부터 ASMR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 중이다.
그는 홈페이지에서 “연구를 통해 사람들이 왜 ASMR을 들으면 안도감을 느끼는지 알아낼 것”이라며 “결과가 나오면 수면장애나 스트레스를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설문조사는 지난 1월 기준 응답자가 2만명이 넘었고 현재 데이터를 분석 중이다.
처음 만나는 ASMR
내게 편안함을 주는 소리는 어떻게 찾아야 할까. ASMR 초보자는 수십 가지 소리를 모아놓은 ‘테스트 영상’을 활용하는 것이 좋다. 데이터가 제한돼 있다면 와이파이는 필수다. 한껏 볼륨을 키웠다가 예기치 못한 광고 때문에 잠이 달아나는 경우도 많으니 주의하자.
편안한 소리를 찾는 것이 관건이지만, 뇌가 인지하지 못했던 사소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경험도 새롭다. 지난한 일상이 생기를 찾고 잠자던 감각이 깨어난다. 그 속에서 나만의 ‘힐링’까지 얻을 수 있다면 ASMR은 분명 의미 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ASMR
청각, 시각, 촉각 등으로 뇌를 자극해 나타나는 심리적 안정과 쾌감을 일컫는 말. 자율감각 쾌락반응(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을 뜻한다. 2010년 미국의 제이퍼 앨런이라는 회사원이 처음 고안했다. 앨런은 미국 스테디헬스닷컴 사이트에 개설된 토론방에서 '기분 좋은 이상한 감각'에 대해 이야기하다 이와 관련된 페이스북 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해 이 용어를 만들었다. 그는 "이 쾌감의 핵심 특성을 나열하고 각각을 적절히 묘사할 어휘를 찾다보니 ASMR로 요약됐다"고 말한다. 유튜브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ASMR 콘텐츠는 소리를 극대화한 영상이 대다수지만 실제 ASMR은 다양한 경험으로 나타날 수 있다. 누군가 귀를 파줄 때 기분 좋게 소름이 돋거나, 두피 마사지를 받으며 온몸이 나른해지는 것도 ASMR의 일종이다. 집중력을 높여준다는 '백색 소음' 역시 ASMR의 범주에 들어간다.
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 그래픽=박동민 기자
[& And 트렌드] 소리가 속삭였다, 연인처럼 편안하게
입력 2017-03-31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