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어기고 도망가다가 자신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 큰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사공들은 “이 사람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욘 1:14)라고 부르짖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 사람이 다수에게 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영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한 사람 때문에 다수가 멸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공들은 요나 때문에 배에 있는 모든 사람이 멸망할 수는 없다고 부르짖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지은 죄로 인해 모든 인류에게 고난이 찾아온 것처럼 대표성을 띠는 중요한 사람의 범죄는 그가 속한 모든 공동체에 고통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국가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으로 백성이 고통당하는 현실을 목도하게 됩니다. 혹시 나 한 사람 때문에 내가 속한 가족이나 직장, 교회, 어느 공동체가 멸망할 수 있는 위기에 처하지는 않을지 살펴봐야 합니다.
두 번째 한 사람 때문에 다수가 살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서 요나 한 사람이 바다에 던져지자 다수가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살길이 열렸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의 중보기도로 롯의 가족들이 살 수 있었습니다. 요셉 한 사람으로 인해 애굽의 모든 족속이 살 수 있었고, 굶주림으로 망할 위기에 처했던 야곱의 가족 70인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 한 사람으로 인해 우리 집안이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나 한 사람으로 인해 교회가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나 한 사람으로 인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사회가 살아날 수 있는 소중한 인물이 돼야 합니다.
세 번째 다수 때문에 한 사람이 망할 수도 있습니다. 종종 다수가 작당해서 한 사람을 망하게 할 수 있음도 봅니다. 여러 사람이 음모를 꾸며 한 사람을 위기에 빠트리는 일도 쉬운 일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봅니다. 이 사건은 똑같은 잠재적 범죄자들이 한 여인을 희생함으로써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한 모습입니다. 종종 다수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충동을 부추기고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모습을 보곤 합니다.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다수의 교만함과 악함에 결코 가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수가 항상 옳은 게 아닙니다. 그렇기에 다수라고 하지만 그 속에 불순한 동기가 있지 않은지 조심스럽게 살펴야 할 것입니다.
네 번째 다수로 인해 한 사람이 살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한 중풍병자를 다수가 주님께 데리고 오면서 그를 살릴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변에 연약한 사람,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을 여럿이 힘을 모아 살게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전도하다 중화상을 입어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개척교회 사모님의 안타까운 처지가 국민일보를 통해서 알려지자 3일 만에 7000여만원의 후원금이 모아져 사모님의 가정에 희망의 빛을 준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한 사람을 위해 힘을 모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살리고 망치는 것엔 영적인 원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행실을 살피고 어떤 선택과 결정이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지 깊이 고민할 때 멸망의 길이 아닌 생명의 길로 접어들 수 있을 것입니다.
오주환 익산 예안교회 목사
[오늘의 설교] 일다(一多)원리
입력 2017-03-30 0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