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읍의 동남쪽에 자리한 골짜기 마을인 사곡면 화전리. 서쪽에서 동쪽으로 긴 골에 화전2·3리가 숨은 듯 자리한다. 마을이 들어선 것은 300여년 전. 산비탈에도 냇가에도 담장 언저리에도 논두렁밭두렁에도 산수유나무가 지천이다. 자생하던 나무에 더해 사람이 심고 가꾸어 온 것이 어느덧 3만여 그루. 묘목까지 합하면 10만 그루에 이른다.
마을에 들어서면 꽃 속에서 다시 꽃망울이 터져 폭죽을 터뜨린 듯한 노란 얼굴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마을의 입구는 화전3리다. 조선 선조 때 호조참의를 지낸 노덕래(盧德來) 선생이 1580년쯤 마을을 개척해 ‘풍년만이 계속되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전풍(全豊)’이라 했다 전한다. 마을에 산수유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전답의 흙이 빗물에 쓸려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약재가 되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였다.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개울가의 산수유나무는 수령 300년 이상이다.
골짜기의 가장자리를 따라 약 4㎞의 산책로가 이어진다. 2㎞쯤 오르면 화전2리(숲실)다. 머루와 다래 넝쿨이 숲을 이뤄 ‘숲실’이라 불렸다. 한자로는 ‘벼가 숲을 이룬다’는 화곡(禾谷)이라 했다. 화곡이 전풍과 합해져 화전(禾全)이 됐다. 꽃밭(花田)이 아니었다. 숲실의 산수유는 더욱 화사하다. 노란색 꽃 사이로 지난해 미처 수확의 손길을 받지 못해 주름진 채 매달려 있는 검붉은 열매가 시간의 경계에 선 것 같다.
전망대의 뒤쪽 골짜기 가장 깊은 곳에는 ‘마을의 젖줄’ 숲실지(화곡지)가 펼쳐져 있다. 산수유길 4㎞가 여기서 끝난다. 이곳에서 골짜기의 북쪽 가장자리를 따라 완만한 등산로 4㎞가 마을 이어진다.
화곡지 인근 전망대에서 굽어보는 경치가 절정이다. 눈 아래 펼쳐져 있는 100만개의 노란 빛에 가슴이 먹먹하다. 저 노란꽃들이 여름의 뜨거운 태양을 받아 여물면 늦가을 붉은 열매를 맺는다. 산수유 열매는 차와 술, 한약재로 쓰인다. 씨앗에는 독성이 있어 과육만 쓴다. 올해 축제는 취소됐지만 먹거리, 볼거리, 체험거리는 풍성하다.
마을의 마늘밭에서는 푸르른 싹이 노란 물결과 대조를 이룬다. 의성마늘이다. 역사는 500년에 이른다. 1527년(중종 22년) 의성읍 치선리에 터전을 잡은 경주최씨와 김해최씨가 처음 재배하기 시작했다.
금성면에는 약 7000만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에 분화한 뒤 오래전 화산활동을 멈춘 사화산(死火山)인 금성산(해발 531m)이 자리하고 있다. 그 아래에 옛 무덤들이 무리를 지어 누워 있다. 대리리, 탑리리, 학미리 일대에 크고 작은 고분들은 370기가 넘는다. ‘잃어버린 고대왕국’ 조문국(召文國) 후예들이 남긴 고분군이다.
조문국. 기록이 많지 않지만 대동지지(大東地志)와 읍지(邑誌)는 ‘현재의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에서 남쪽으로 25리 떨어진 금성면 일대’에 조문국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벌휴이사금이 조문국을 정벌하였다’는 내용이 짧게 기록돼 있다. 이로써 조문국은 삼한 시대 의성지역에 번성했던 국가였고 벌휴이사금 때인 185년 신라에 복속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봉분들은 고요하게 솟아 있다. 원형 봉토분으로 대부분 묘석이 없다. 경덕왕릉만 ‘召文國景德王陵(조문국경덕왕릉)’이라고 쓰인 비석과 문인석, 장명등, 상석으로 단장돼 있다. 건너편 초전리에는 ‘의성조문국박물관’이 있다. 옥상에 서면 고분군이 한눈에 조망된다. 그 뒤로 금성산이 철의 성벽처럼 솟아 있다.
이곳에서 5㎞ 떨어진 금성산 자락에 자리잡은 산운(山雲)리는 조선 명종 때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학동 이광준이 입향하면서 영천이씨의 집성촌이 됐다. 마을 뒤를 고즈넉하게 둘러싼 금성산의 수정계곡 아래 구름이 감도는 것이 보여 이름지어졌다고 전해진다. 토담을 끼고 안쪽으로 들면 운곡당, 점우당, 소우당이 이어진다. 운곡당과 소우당은 개방돼 있어 조선시대 양반가의 생활양식을 엿볼 수 있다. 소우당은 안채보다 정원이 있는 별당이 더 유명하다. 부드러운 곡선미가 절경인 연못과 다양한 수석, 그리고 나무들이 운치를 더해 ‘영남 제일의 정원’으로 불린다.
의성 북부 점곡면에 사촌마을이 있다. 안동김씨와 풍산류씨, 안동권씨의 집성촌으로, 30여동의 전통가옥이 잘 가꿔져 있다. 그중 만취당은 임진왜란 이전인 1582년(선조 15년)부터 3년간 세운 건물로, 보물로 지정돼 있다.
마을의 북쪽에서 남쪽 미천까지 가로로 난 ‘사촌리가로숲’(천연기념물 405호)이 마을의 격을 높여준다. 상수리나무 팽나무를 주종으로 400∼600년 된 거목들이 하천 양쪽으로 폭 30m, 길이 1050m나 이어진다.
■ 여행메모
전탑·목조 건축의 국보 탑리 오층석탑
의성마늘소… ‘마늘 고장’ 먹거리 다양
수도권에서 갈 경우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낙동분기점에서 지난해말 개통된 상주영덕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북의성나들목에서 빠지면 된다. 사곡면에 위치한 산수유마을에 주차장이 여러 곳 마련돼 있지만 성수기에는 평일에도 비좁을 정도다.
윗마을 숲실 위쪽 숲실지(화곡지)까지 도로가 포장돼 있지만 좁은 데다 교행할 곳도 많지 않아 차를 몰고 가면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화전3리 산수유복합센터나 화전2리 인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걷는 것이 현명하다.
산수유마을에서 금성산 고분군으로 도로 바로 옆에 ‘제오리 공룡발자국화석’이 있다. 금성면 탑리에는 신라시대 석탑, 국보 제77호 탑리 오층석탑이 있다. 전탑(塼塔)의 양식과 목조 건축의 특징을 동시에 보여주는 진귀한 탑이다. 목조 건축에서만 찾아 볼 수 있을 주두(기둥머리)와 기둥의 배흘림 양식이 특징이다.
의성마늘은 독특한 향기와 더불어 부드럽고 매운맛 덕분에 전국의 주부와 식도락가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국내 대표적 마늘산지답게 마늘을 활용한 먹거리가 다양하다. 마늘을 먹여 키운 돼지와 소고기가 대표적이다. 의성나들목에서 가까운 봉양면소재지에 ‘의성마늘소 먹거리타운’이 형성돼 있고 의성읍내에는 마늘요리 전문식당이 즐비하다.
의성=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 그래픽=안지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