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꼬리 월급 받는데… 주차·분리수거 등 ‘만능맨’ 요구

입력 2017-03-28 05:01

지난 18일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에서 불이 나 주민 대피를 돕던 경비원 양모(60)씨가 숨졌다. 그는 비상구 계단을 오르내리며 주민을 대피시켰다. 엘리베이터는 멈춘 상태였다. 호흡곤란으로 계단에 쓰러진 그는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아파트 경비원은 말 그대로 ‘만능맨’이다. 양씨처럼 위험 발생 시 주민을 대피시키는 것부터 분리수거까지 경비원의 임무는 끝이 없다. 국민일보는 서울시내 아파트 4곳에서 경비원 10여명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신원 보호를 위해 모두 가명 처리했다.

주차에 택배 수령에, 만능 경비원

서울 서대문구 C아파트의 경비원 강주원(74)씨는 26일 드나드는 외부 차량 번호를 확인하고 있었다. 원래 차량 관리 전담 직원이 있었지만 계약이 만료돼 강씨가 떠맡게 됐다. 일은 늘었지만 추가 수당은 없었다. 기본급과 야간수당만으로 이뤄진 강씨의 이달 월급은 152만원이었다.

아파트 경비원이 만능맨이 된 이유는 주민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살펴야 하는 ‘을(乙)’의 처지이기 때문이다.

경비(警備)의 뜻은 위험사고가 나지 않도록 미리 살피는 일이지만 실제로 분리수거, 제설작업 등도 당연히 경비원이 해야 하는 일로 주민들은 생각한다. 무인경비시스템 도입 논란이 일었던 서울 송파구 B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붙은 주민 호소문에는 “경비원이 경비 외 해오던 업무(분리수거, 낙엽처리, 제설작업 등)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고 적혀 있었다.

경비원의 근로계약서에도 본업무와 부가업무의 경계가 없는 경우가 많다. 강남구 A아파트의 경우 경비원 업무지침상 주차는 경비원 일이 아니다. 아파트 측은 감시·순찰 외 주차와 분리수거 등은 ‘주민 편의 제공’이라는 업무에 포함된다고 설명했다.

박병식 동국대 법학과 교수는 “한국은 아파트 경비원에게 말 그대로 토털 서비스를 요구한다”며 “여기에 익숙해지면서 주민들도 경비업무 외 다른 것까지 요구하고, 그러다보니 그중에 갑질하는 주민들도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24시간 근무, 월급은 154만원

아파트 경비원의 근무 환경은 매우 열악하다. 국민일보가 찾은 서울 강남·송파·서대문·관악구의 아파트 4곳 경비원은 모두 24시간씩 격일제로 근무하고 있었다.

송파구 B아파트 경비원 윤정식(62)씨는 근무일 오전 7시부터 다음날 같은 시간까지 근무한다. 이 중 휴식은 주간 3시간, 야간 4시간이다. 이때 잠도 자고 밥도 먹어야 한다. 관악구 D아파트 경비원 최철수(69)씨는 윤씨보다 하루 1시간을 더 쉰다. 하지만 쉬는 동안에도 경비초소를 벗어나면 안 된다. 최씨는 “공휴일도 명절도 없는 삶”이라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최씨 통장에는 월 154만원이 들어온다.

강남구 A아파트 경비원 문수일(56)씨는 오전 10시, 오후 4시 도시락 2개로 끼니를 때운다. 문씨는 “밥시간이랄 게 딱히 없는 게, 밥 먹다가도 주민이 부르면 바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열악한 근무조건은 모두 합법이다. 근로기준법에서 경비원과 같은 감시·단속적 근로자는 근로시간과 휴게 등의 규정에서 예외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경비 업무는 다른 업무와 비교해 심신의 피로도가 적다는 게 근로기준법의 전제”라며 “그래서 법에서도 예외로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아파트 경비원은 앞서 보듯 감시·단속 업무 외에 주민 심부름 등 다양한 일까지 감당해야 한다. 경비원에게 광범위한 업무를 떠맡기면서 법적인 권리를 보장해야 할 때는 최소한의 일만 한다고 간주하는 모순이 생긴다. 고용부 관계자는 “기본적으로는 감시 업무를 하지만 병행 업무를 반복적으로 수행하거나 겸한다면 (감시·단속적 근로자에) 해당되기 어려울 수 있다”며 “다만 이 기준이 모호하다”고 했다.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경비업무 외 부과된 일들을 단순히 병행하는 업무라고만 하기에는 강도가 결코 낮지 않다”고 지적했다.

법적 보호와 인식변화 같이 가야

경비원에 대한 인식과 처우 개선은 결국 법과 제도를 개선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박병식 교수는 “최저임금 확보가 우선”이라며 “거기에 부가업무에 대한 수당도 확보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무인경비로 전환되느니 (이런 일들을) 참고 일하라는 것도 비인간적”이라며 “무인경비가 도입돼도 반드시 경비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왕 뽑는다면 제대로 된 급여를 확보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도 “예외조항 없이 근로기준법만 적용돼도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무인경비시스템과 경비원 고용의 효용성 비교 연구를 진행한 하재룡 선문대 행정학과 교수는 “노인 일자리 문제 해결부터 건강, 노년 빈곤 문제까지 통합적으로 고려할 때 비용 대비 편익이 일반적인 인식보다는 훨씬 높다”며 “예컨대 충남 아산시에서는 유인경비시스템을 모범적으로 운영하는 아파트에는 시 예산으로 인건비 일부를 보전해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임주언 기자 eon@kmib.co.kr, 일러스트=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