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민영연금의 실패… 은퇴자 200만명 거리로

입력 2017-03-28 00:03
칠레 남성이 26일(현지시간) 수도 산티아고에서 민영 연금제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뉴시스

‘연금 모범국’으로 불리던 칠레에서 연금 개혁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영국 BBC방송과 AP통신은 26일(현지시간) 칠레 국민 200만명이 이날 수도 산티아고(약 80만명)를 비롯한 아리카, 탈카 등 전역에서 민영 연금제 개혁을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시위대는 칠레 국기에 ‘민영 연금제도 반대(NO+AFP)’라고 쓰고 시위를 벌였다.

칠레의 현행 연금제도는 1981년 독재자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전 칠레 대통령 시절 도입됐다. 모든 칠레 노동자들이 의무적으로 급여의 10%를 민영 연금관리회사(AFP)에 맡기는 식이다. AFP는 적립된 금액을 투자해 실적에 따라 연금을 지급한다. 도입 초기에는 연평균 자산운용 수익률이 10%를 넘기도 했다. 당시 파격 실험으로 여겨지며 주목을 받았다.

칠레 연금제는 정부의 재정 부담을 줄이고 지급액이 증가한다는 이유로 전 세계에서 성공 사례로 호평받았다. 칠레인들도 한때 은퇴 전 임금의 70%를 연금으로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꿈에 부풀었다. 민영으로 운영돼 지급액이 공영 연금과 비교할 수 없이 많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인인구가 급증하고 AFP가 부패하면서 노동인구의 부담이 가중되고 연금 지급액이 줄어들게 됐다. 때문에 시위대는 민영 연금제가 은퇴 빈곤층을 양성하고 있다면서 개혁 또는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들은 “현행 연금제로 인해 칠레 사람 대다수가 최저급여 400달러(약 45만원)에도 못 미치는 연금을 받게 돼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져가고 가난한 자는 소외받는 제도라는 목소리도 나왔다. 투자수익에 따라 연금액이 달라져 저소득층의 노후보장과 소득재분배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불만이 쏟아졌다. 일부 전문가는 자산을 운용하는 민간 업체들만 이 제도를 통해 혜택을 보고 대다수 국민은 투자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위험 부담을 전적으로 떠안고 있다고 꼬집었다.

미첼 바첼레트 칠레 대통령은 지난해 8월 민영 연금제의 연금 지급액을 늘리고 민간 업체의 수수료를 줄이는 내용의 개혁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개혁안을 놓고 구체적인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의회로 넘어가지 못한 상황이다. 바첼레트는 개혁안의 조속한 의회 통과를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연금 개혁이 더 이상 지연되면 오는 11월 대선 판도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전망이 많다.











권준협 기자 ga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