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현지 시간) 이스라엘 수도 예루살렘 중앙공원. 공원 도로에서 러닝복 차림의 3만여명이 스타트건 총성에 일제히 달리기를 시작했다. 예루살렘 국제마라톤대회의 시작이었다.
이들 사이에 로스 버클리(39)씨도 있었다. 버클리씨 주변엔 ‘원 패밀리(One Family·한 가족)’라고 쓰여진 티셔츠를 입은 남녀노소가 함께 달렸다. 원 패밀리는 이스라엘 전역에서 벌어진 테러사건에 가족이 희생된 사람들의 단체다. 같이 달리던 20대 여성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주로 사는 가자지구 근처에서 승용차를 타고 가다 갑자기 나타난 팔레스타인 남성에 의해 동승한 어머니가 총격당하는 걸 그냥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이들이 마라톤에 참가한 이유는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서다. 같은 울타리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 아랍인이 증오가 아닌 공존하는 방법을 찾겠다는 것이다.
예루살렘마라톤은 여느 마라톤대회와 다르다. 그저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육체적 경기’ 가 아니라 아브라함부터 다윗, 예수님까지 이어져 내려온 기독교 유적을 순례하는 ‘영혼의 레이스’라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고대 이스라엘왕 다윗이 3000여년전 지은 성곽을 경계로 ‘뉴시티(신시가지)’와 ‘올드시티(구시가지)’로 나뉜다. 성곽 안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골고다 언덕과 다시 부활한 무덤, 초대교회 등 기독교 성지와 유대인이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며 마주했던 ‘통곡의 벽’이 보존돼 있다. 중세 내내 이곳을 지배했던 이슬람의 흔적도 여전하다. 다윗 왕이 세운 성전의 자리엔 이슬람 모스크가 세워져 아직도 이슬람교도 이외의 사람에겐 통행이 허락되지 않는다.
42.195㎞의 마라톤을 달리며 이 모든 역사를 둘러볼 수 있다. 21.1㎞의 하프마라톤, 10㎞, 5㎞ 등의 코스도 있다. 언덕과 비탈을 오르내리는 난코스지만, 히브리대학이 자리 잡은 스코퍼스산에 오르면 신·구 시가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엘리트선수들도 출전하는 정식대회이지만, 모든 시민이 즐기는 축제이기도 하다. 니르 바르캇 예루살렘 시장이 7년 전 “모든 예루살렘인이 참가해 서로에게 친 장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는 축제의 장을 만들겠다”는 취지로 창설한 마라톤이다. 그래서인지 7세 아이부터 70세 할머니, 휠체어를 탄 장애인, 구렛나루를 면도하지 않는 유대교 풍습에 따라 옆머리를 길게 기른 정통파 유대교인까지 뒤섞여 뛰고 있었다. 예루살렘 시당국에 따르면 외국인도 3000여명이 참가했다.
서로 반목해온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도 함께 달린다. 마라톤 내내 참가자들은 힘겨워하는 옆 사람을 격려하는 동료애로 뭉쳐 있었다. 경찰의 경계도 그다지 삼엄하지도 않았다.
이 대회 남자부 1위는 2시간17분36초로 결승선을 통과한 케냐의 샤드락 키프코기 선수가 차지했다. 여자부도 ‘마라톤 강국’ 케냐의 에밀리 체프케모이가 2시간49분25초의 기록으로 우승했다.
“예루살렘 곳곳을 달리며 ‘그래도 세상엔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습니다.”
마라톤을 끝낸 원패밀리의 한 회원은 그렇게 말했다. 잘못된 믿음이 낳은 악행에 가족이 희생됐지만, 그의 눈에는 용서가 담겨 있었다.
이스라엘 관광청 관계자는 “바깥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늘상 테러 위협에 시달리는 나라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며 “예루살렘마라톤은 스포츠이벤트이면서도 영혼의 울림을 느낄 수 있는 축제”라고 했다.
“달리기 하며 기독교 성지 둘러보세요”… 이스라엘서 열리는 다른 마라톤
달리기를 하며 기독교 성지를 둘러볼 수 있는 다른 마라톤대회도 이스라엘에는 많다. 예수님이 사탄의 유혹을 뿌리친 사막부터 오병이어 기적을 행했던 갈릴리 호수, 지중해안의 도시 텔아비브까지 다양한 지역에서 열린다.
◇성서 마라톤대회=‘안식의 장소’란 뜻의 실로에서 ‘도움의 돌’이라는 뜻의 에벤에셀까지 달린다. 창세기 49장 10절 말씀에는 ‘실로가 오시기까지’라고 돼 있다. 메시아를 뜻하는 유대어이기도 하다. 바로 그 실로에서 유대인이 블레셋인을 물리치는 기적이 일어났던 에벤에셀까지 이어지는 코스다. 주로 10월에 열린다.
◇텔아비브 삼성 마라톤대회=텔아비브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곳으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시로 꼽힌다. 이 대회는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대규모 대회 중 하나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야포 유적지와 지중해 해변을 따라 달린다.
◇티베리아스 국제마라톤대회=오병이어의 기적이 행해진 갈릴리 호수 변을 따라 펼쳐지는 마라톤. 해수면 200m 아래 요르단 계곡의 고대 유적지들을 따라 코스가 이어진다. 갈릴리 호수를 둘러싼 티베리아스 도로에서 출발해 요단강을 지나 엔게브 키부츠의 전환점까지 올라간 후 다시 티베리아스로 돌아온다.
◇이스라만 철인3종 경기=세계 10대 철인3종 경기. 휴양도시인 에일랏에서 개최된다. 3.8㎞의 수영, 180㎞의 사이클, 42.195㎞의 마라톤으로 이뤄진다. 본 대회보다 난이도가 낮은 경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1.8㎞ 수영, 90㎞ 사이클, 21.1㎞ 마라톤으로 구성된 하프 철인3종 경기도 있다.
◇마운틴 투 벨리 랠리=한 달 동안 열리는 울트라마라톤이다. 12명의 주자가 돌아가며 하루에 5∼14㎞씩을 뛰는 대회다. 팀별로 참가한다. 갈릴리 호수 근처에서 시작해 사해(Deadsea) 부근까지 이어지는 경기다. 달리다 보면 예수님이 사탄의 유혹을 물리쳤던 사막도 달리게 된다.
◇헤르츨리아 여성 철인3종 경기=텔아비브 북부 지중해 해변 마을인 헤르츨리아에서 개최된다. 개인 또는 팀으로 참여 가능하며 지난해에는 8세의 어린 소녀부터 80세까지 1800명 이상이 이 대회를 참가했다.
예루살렘=신창호 종교기획부장 procol@kmib.co.kr
지구촌 평화 위한 레이스… 인종·이념 떠나 함께 달렸다
입력 2017-03-29 0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