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어느 마을을 가든 박물관이나 기념관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짧은 역사를 만회해 보려는 심산인지는 몰라도 별것 아닌 물건들도 전시해 놓고 자랑스러워한다. 파리나 베이징 등 유서 깊은 도시를 둘러본 한국 관광객이라면 역시 미국 여행 시에는 에펠탑이나 천안문 같은 역사적 유물보다는 나이아가라 폭포나 그랜드캐니언 등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더 선호할 것이다.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이나 윌리엄스버그에 가면 영국의 첫 식민지임을 상기시키는 민속마을이나 기념관이 즐비하다. 10년 전 식민지 개척 400주년을 기리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을 미국인들이 지극정성으로 환대하는 장면은 일본 제국주의 잔재를 지긋지긋해하는 한국 관광객들 입장에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풍경이기도 하다.
프랑스로부터 선물 받은 자유의 여신상 외에 미국이 미국다움을 상징하는 기념물은 뭐가 있을까. 역시 세계 최강국으로 발돋움하는 토대가 된 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 승리의 상징물인 전함일 것이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항구 도시이자 유명 관광지인 찰스턴에는 항공모함 요크타운(CV-10)을 비롯한 구축함 잠수함 등이 정박해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요크타운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해군을 격퇴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1975년 퇴역해 찰스턴에 영원히 정박할 때까지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도 참가하기도 했다.
미국인들은 이처럼 승리를 상징하는 유물뿐 아니라 수치스러움도 역사적 기념물로 남기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41년 일본군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으로 침몰해 1177명의 선원이 희생된 전함 애리조나호(BB-39)를 인양하지 않고 그 위에 진주만기습 기념관을 만들기로 했다. 1177명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장병은 107명에 불과할 정도로 미군의 피해는 참담했다. 습격 당시 600만ℓ에 가까운 기름이 채워져 있어 지금도 검은색 기름이 바다 위로 떠오르는데, 미국인들은 이를 희생된 미군의 눈물로 여겨 ‘블랙 티어스(black tears)’라고 부른다. 공습 당시 생존한 미군들은 지금도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이곳에 유해를 뿌려 달라고 민원할 만큼 애리조나호는 미국인들에게 각별하다.
3년 가까운 세월을 진도 앞 맹골수도 44m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던 세월호가 인양돼 며칠 뒤면 목포신항에 닿을 것이다. 아쉬운 것은 세월호가 진도 팽목항으로 바로 건져지지 않고 87㎞나 떨어진 곳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점이다.
당국자들은 세월호를 빨리 잊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인양 시나리오를 짜놓은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정부 쪽에서는 팽목항 자체가 선체를 접안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얘기도 있고 세월호 사고 이후 관광객이 현격히 줄어 주민 불편이 가중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렇더라도 미수습자 시신을 찾고 사고 조사를 마무리한 뒤에는 몇 년이 걸리더라도 선체 보존방안을 강구하는 게 바람직하다. 애리조나호가 진주만 앞바다에 기념관으로 부활한 것도 2차 대전이 끝나고 16년이 지난 1961년이었다. 때마침 세월호 인양 시기는 이틀 전 46명의 용사 추모식이 열린 천안함 폭침 사건과 오버랩된다. 혹자들은 진보와 보수로 구분하려 들지만 천안함이든 세월호든 모두 가슴 아프고 기억해야 할 비극이지 색깔의 문제가 아니다. 평택2함대에는 천안함의 흔적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우리는 용사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그들의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 비극의 역사지만 잊어서도, 잊혀져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세월호도 마찬가지다. 고철로 싼값에 팔려나가서는 안 된다. 다시는 이런 어이없는 인재가 일어나지 않도록 교육의 장으로 삼아야 한다. dhlee@kmib.co.kr
[돋을새김-이동훈] 애리조나호, 천안함, 세월호
입력 2017-03-27 19:07 수정 2017-03-28 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