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둥에 ‘시옷(ㅅ)’ 혹은 ‘이응(ㅇ)’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게 나무가 피워낸 잎이나 꽃 같다. 그 나무가 갑자기 큰 획을 긋듯이 움직이니 추상화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원로 시각 디자이너 안상수(65·사진)의 ‘한글 영상 작품’ 앞에서 묘한 감동을 느낀다. 그는 이렇듯 한글을 순수미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열리는 ‘세마 그린’의 기획전 ‘날개. 파티’에는 영상작품 뿐 아니라 조선시대 문자도를 연상시키는 ‘한글 문자도’, 타일 벽화, 실크 스크린, 편집 디자인, 로고 디자인 등 다양한 실험을 한 한글 작품들이 나왔다. 글꼴 디자인 ‘안상수체’로 알려진 그가 타이포그래피(Typography)를 새롭게 창안한 한글 미술의 세계에 입이 벌어진다.
벽면 가득 채운 흰색 타일 벽화에는 ‘파티’ ‘상생하라’ ‘당당하라’ 등의 단어뿐 아니라 ‘ㅃ ㅃ ㅃ’ 등 한글 자음들도 있다. 그 자체가 문자의 숲이다. 안상수체는 오랫동안 한자식 네모의 틀에 갇혀 있던 한글을 현대적으로 탈바꿈시킨 첫 시도이다. 전시장의 작품들엔 그런 해방의 기운이 넘쳐난다.
‘세마 그린’은 서울시립미술관이 격년제로 원로 작가를 조명하는 기획전. 제1회인 2013년 1970년대 실험 미술의 개척자 김구림에 이어 2015년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대모 윤석남이 초대됐다. 올해는 처음으로 디자이너를 선정했는데 그만큼 안상수의 족적이 녹록지 않아서일 것이다.
이번 전시는 안상수의 한글 작품을 조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가 세운 한글 디자인 교육 기관인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파티)의 활동상황도 보여준다.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출신으로 동 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정년을 5년이나 앞둔 시점에 표표히 사표를 던졌다. 그러곤 후진 양성을 위해 파티를 세웠다.
그는 최근 기자와 만나 “예순 이후의 삶은 보너스라 생각했다. 남은 삶 동안 교육을 디자인하고 싶었다”며 “창의를 실험했던 지난 5년간의 결과물도 이번에 내놓았다”고 말했다. 그가 ‘무허가 대학’이라 표현한 파티는 올해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는 “우리 학교는 최고의 디자이너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삶을 찾아가도록 가르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날개는 안상수의 호이자 파티의 교장을 뜻하는 용어다. 최효준 서울시립미술관장은 “문자의 근본 속성을 탐구하고 디자인 교육의 미래를 살펴보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전시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5월 14일까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한글, 순수미술로 피어나다… 디자인 거장 안상수 ‘날개, 파티’ 展
입력 2017-03-28 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