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안보환경이 매우 취약해진 시점에 한국은 본격적인 조기대선 국면에 돌입했다. 대선 주자들 모두 국익 중심의 외교안보를 주창하고 있지만 그들이 내놓고 있는 정책은 제각각이다. 어엿한 중견국가로 성장한 한국이지만 중량급 국가들이 각축하는 동북아의 지정학적 구도에서는 여전히 경량급이다. 실존하는 북한의 위협 역시 너무 위중하다. 그러한 현실을 감안하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외교안보정책의 선택지는 그리 넓을 수 없을 텐데, 너무 소모적인 갈등을 하고 있고 정치권은 갈등의 중심에 있다.
모두 국익을 논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국익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선거에 의해 주기적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외교안보 정책의 ‘정치화’는 어느 정도 피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퍼펙트 스톰’급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외교안보정책의 탈(脫)이념화와 탈정치화는 국가의 생존과 직결된 매우 시급한 과제이다. 외교안보정책의 탈이념화와 탈정치화를 위해서 한국의 핵심 국가이익에 기반을 둔 외교안보 대원칙을 세워야 한다.
이를 위해 다음을 제안한다. 첫째, 정치권은 당장 초당적인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21세기 대한민국의 핵심 국가이익을 규정하는 작업에 나서야 한다. 우리는 외교안보정책에 있어서 국가이익이라는 개념을 자주 사용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타협할 수 없는 핵심 국가이익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국가적 작업을 수행한 적이 없다. 초당적 TF가 21세기 대한민국 핵심 국가이익을 규정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정치권은 이에 근거를 둔 외교안보 대원칙에 대한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둘째, 대선 이후 새로 출범하는 정부는 초당적 TF 활동을 계속 지원하면서 외교안보 대원칙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구하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1994년 발표된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 민·관·연(民·官·硏)이 모두 합의과정에 관여했기에 진보정권과 보수정권 모두 계승해온 평화통일 대원칙으로 작동할 수 있었다. 21세기 대한민국 외교안보 대원칙 규정작업도 이러한 국가적 합의 도출 과정이 필요하다.
셋째,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외교안보 대원칙을 독트린 형식으로 국내외에 천명해야 한다. 그리고 이에 준거하여 개별 정책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하여 주변국 정책과 대북정책을 장기적인 안목으로 수립해 꾸준히 추진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주변국들의 불만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국가적 합의에 기반을 둔 정책이기 때문에 정책에 힘이 붙을 수 있고, 따라서 중장기적으로는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주변국 관계가 정립될 수 있을 것이다. 대원칙에 대한 국내적 합의가 이뤄지면 개별 정책에 대한 이념화와 정치화를 최소화할 수 있다.
2차대전 이후 미국에서는 민주당 해리 트루먼 행정부가 계획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창설과 마셜플랜 등 유럽재건 정책이 당시 공화당의 적지 않은 반대에 부딪혔다. 1948년 미국 대선에서 외교안보정책이 정치화될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시 가장 유력한 공화당 대선 후보 아서 반덴버그 상원 외교위원장은 오히려 트루먼 행정부의 외교안보정책에 초당적 협력을 약속했고, 나토 창설 등 미국 냉전 정책의 초석이 된 ‘반덴버그 결의안’ 통과에 앞장섰다. 반덴버그는 “당파정치는 국경선에서 멈춰야 한다(Politics stops at the water’s edge)”는 명언을 남겼고, 이러한 정신에 입각한 초당적 ‘냉전 시기 국가적 합의(Cold War Consensus)’는 미국이 냉전에 승리할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한국판 반덴버그 결의가 절실한 시점이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정치학 교수
[한반도포커스-김재천] 한국판 ‘반덴버그 결의’ 시급하다
입력 2017-03-26 1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