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황영희 <6> “필리핀, 왜 하필 지금인가요”… 하나님과 실랑이

입력 2017-03-27 00:07
황영희 선교사가 2011년 필리핀 세부 힐루동안 지역 쓰레기마을에서 구제활동을 펼치고 있다.

2009년 여름. 묵상 중에 하나님께서 계속 창세기 12장 1절 말씀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시는 말씀이다. ‘왜 내게 이러한 말씀을 주실까. 날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뭘까’ 고민하던 중 우연히 청년 시절 섬기던 목사님께서 필리핀에 선교사로 가신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지난 10년 간 연락이 끊겼던 목사님과의 우연한 조우. 문득 창세기 말씀이 떠올랐다. ‘이게 하나님이 주시는 또 다른 계획일까.’ 아니나 다를까. 목사님께서 내게 필리핀 선교 사역을 제안하셨다.

처음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때 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몸이 불편한 남편, 어린 두 아이가 있는 이상 내 인생에 해외선교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 하필 지금인가요. 지금 제 상황 잘 아시잖아요.’ 그때 하나님과 얼마나 실랑이를 했는지 모른다.

청년 시절 케냐 선교사를 꿈꿀 때 생각지도 못했던 이유로 꿈을 접게 하셨고, 중국에 선교사로 가고자 할 땐 결혼하라고 말씀하셨던 하나님이기에 더 그랬다. 그렇게 갈등하는 와중에 또 다른 통로를 통해 필리핀 장애인 선교 제안을 받게 되었다. 한번도 가본 적 없는 필리핀이 신기루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아. 하나님의 뜻이구나.’

2010년 6월 필리핀 세부에 도착했다. 처음엔 힐루동안, 빵안안 등 섬에서 장애인 사역을 했다. 그러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열악한 상황이 이어졌다. 식수가 없어 빗물을 받아 사용하는 사람들. 가난한 장애인들에겐 빗물조차 받아 쓸 여력도 없었다. 섬사람들은 대부분 물고기를 잡아 쌀로 바꿔서 식량을 마련했는데 몸이 불편하니 그마저도 할 수 없는 장애인들은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장애인들에게 쌀과 비타민을 나눠줬다. 하지만 나 또한 넉넉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어려움이 컸다. 파송단체의 상황도 열악했을 뿐더러 개인적인 후원자도 거의 없었다. 역시 믿을 건 기도뿐이었다. “주님, 이 땅 장애인들의 삶이 너무 고달픕니다. 제발 이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동역자를 만나게 해주세요.” 매일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쉼 없는 기도가 이어졌다.

얼마 후 밀알복지재단의 정형석 대표와 연락이 닿았다. 국내에서 20여년 장애인 복지사업에 주력해 온 밀알복지재단은 해외까지 사역 범위를 넓혀나갈 계획이었다. 때마침 내가 장애인 사역을 위해 세부로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된 정 대표가 먼저 연락을 준 것이다.

밀알복지재단 관계자들은 사역지를 방문해 장애인들의 열악한 현실을 둘러봤다. 그리고는 면밀한 검토 끝에 지원을 결심했다. 간절한 기도에 또 한 번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밀알복지재단과 협력하게 되면서 사역은 차츰 안정적 궤도에 올랐다. 비정기적으로 지원 활동을 해오다가 정기적으로 구제사역을 진행할 수 있었다.

자신들을 돕기 위해 꾸준히 찾아오는 나를 보며 주민들의 마음도 차츰 열렸다. 신뢰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경계의 벽이 허물어지자 진심은 주민들에게 빠르게 녹아들었다. 나중엔 현지인들에게도 공개를 꺼리는 빈민가에도 들어갈 수 있게 됐다.

우리는 더 많은 빈민들을 돕기 위해 힐루동안 섬의 지역조사를 시작했다. 이전에 몇 번 사역을 한 적이 있어 내가 선교사임을 알고 있는 섬 주민들은 내게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며 한 집을 가리켰다. 사람 사는 집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곳곳이 부서져 있었다. 나는 집의 방문을 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