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이태원에 나란히 선 현대카드의 두 건물, 뮤직라이브러리(음악 전문 도서관)와 바이닐&플라스틱(음반가게) 사이에 45도 각도로 가파르게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현대카드의 전시공간 ‘스토리지’(Storage)는 입구부터 남달랐다.
현대카드 스토리지가 독특한 실내 디자인과 전시 철학으로 이태원로의 새로운 문화 아이콘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금융회사가 미술 후원을 넘어 스스로 전시를 기획해 선보인다는 점에서 새로운 기업 후원 방식으로 평가된다.
지난 23일 찾은 스토리지에선 스벤 욘케, 크리스토프 카즐러, 니콜라 라델코빅 등 영국의 3인조 아티스트 그룹 ‘뉴멘/포 유즈(Numen/For Use)’의 개인전 ‘보이드’(VOID·텅 빈 공간이라는 뜻)가 열리고 있었다. 이들은 실험성 짙은 작품으로 런던 디자인 뮤지엄 등 유수의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가진 바 있다.
전시장이 지난해 6월 문을 연 이후 3번째 전시다. 옛 식당 건물을 리모델링한 이 전시공간은 노출 콘크리트, 원목 바닥 등이 거친 미감을 뿜어냈다. 내부 인테리어부터 기존의 ‘화이트 큐브’(흰색의 네 벽)에 대한 거부를 선언한다.
이들 3인조는 테이프·실·끈·그물·천 같은 소재를 사용해 이 장소에 어울리면서도 허를 찌르는 키네틱 아트, 체험 아트를 펼쳐놓았다. 해먹 같은 그물 위에 바람 빠진 커다란 투명 큐빅 풍선 같은 게 걸쳐 있다. 부저를 눌렀더니 풍선이 점점 부풀어 하나의 구조물로 재탄생한다. 또 다른 작품은 아주 얇은 ‘포일 거울’ 등을 활용해 착시 효과를 한껏 살렸다. 부저를 누르면 거울 안에 무한대의 격자무늬가 생겨나 황홀하다.
압권은 ‘납작이 천 동굴’이라고 이름 붙이면 좋을 듯한 체험형 작품이다. 가운데는 뚫려 있으면서 위아래가 붙은 자루형 천이 ‘ㅁ’자형으로 이어져 있다. 총 길이 45m 정도. 그 안에 들어가면 어릴 적 이불 속에서 놀던 것처럼 새로운 세상이 있다. 거대한 애벌레의 뱃속에 들어간 느낌도 든다. 사람이 들어가 움직이는 풍경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현대카드 홍남경 큐레이터는 “우리는 다른 갤러리 전시와 경쟁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전시장도, 전시내용도 상식을 배반함으로써 관람객들에게 자극과 영감을 주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스토리지는 현대카드가 지향해온 신(新)예술후원의 미술 버전이다. 현대카드는 스폰서 방식의 예술 후원에서 자체 기획·유치 방식으로 바꿨다. 폴 매카트니 등 레전드급 가수를 국내에 데려와 공연을 하고 카드 회원들에게 세일즈하는 ‘현대카드 슈퍼콘서트’가 그런 예다. 들러리 스폰서를 벗어나 공연 관람 경험조차 마케팅에 활용하고자 한다.
스토리지는 슈퍼콘서트를 시각예술분 야로 확대한 개념이다. 현대카드의 류수진 실장은 “1회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고 365일 현대카드의 가치와 철학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기업으로서는 드물게 큐레이터 출신 2명을 직원으로 채용했다. 이런 문화마케팅을 진두지휘하는 현대카드 CEO 정태영 부회장이 지향하는 가치는 뭘까. ‘영감을 주는 현대카드’다. 류 실장은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다른 해석을 하고, 이런 도전을 통해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현대카드의 브랜딩 지향점”이라고 설명했다. 입장료 성인 3000원. 현대카드 결제시 20% 할인이 된다. 6월 18일까지(02-2014-7850).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상식을 배반… 관람객들에게 자극과 영감 드립니다”
입력 2017-03-26 1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