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전]‘늙은 여우’에 홀린 태극전사

입력 2017-03-24 01:53

태극전사들이 ‘늙은 여우’에 홀렸다. ‘만리장성’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충격적인 패배였다. ‘슈틸리케호’는 늙은 여우로 불리는 마르첼로 리피(69·이탈리아) 중국 감독의 전략에 말려 졸전을 펼쳤다.

한국은 23일 중국 창사 허룽 스타디움에서 열린 중국과의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A조 6차전에서 0대 1로 패했다. 이날 패배로 한국은 3승1무2패(승점 10)를 기록했다. 한국은 우즈베키스탄이 시리아 멜라카 항제벳 스타디움서 열린 시리아전에서 0대 1로 패한 덕분에 A조 2위를 유지했다. 우즈베키스탄은 이날 패배로 3승3패(승점 9)를 기록했다.

울리 슈틸리케 한국 감독은 이번 경기로 다시 입지가 흔들릴 수밖에 없게 됐다. 한국은 2010년 2월 일본에서 열린 동아시안컵에서 0대 3으로 패한 이후 7년 1개월 만에 중국에 두 번째로 무릎을 꿇었다. 중국과의 역대 전적은 33전 18승12무2패가 됐다.

이날 경기 전까지 중국은 창사에서 8차례 A매치를 치렀는데 한 번도 패하지 않고 4승4무를 기록했다. 이 때문에 지난해 말 한국전 장소를 쿤밍에서 창사로 옮겼다. 이번 경기는 한반도 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로 중국 내 반한 감정이 고조된 상황에서 열렸다. 이 때문에 중국의 응원은 광적이었다. 한국 선수들은 경기장 분위기에 압도당한 듯 평소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장점이었던 체력과 조직력에서도 우위를 보이지 못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4-2-3-1 전형을 가동했다. 최전방 원톱 공격수로 ‘원조 황태자’ 이정협이 출격했다. 좌우 날개에는 남태희와 지동원이 포진했고, 구자철은 섀도 스트라이커로 나섰다. 수비형 미드필더로는 기성용과 고명진이 호흡을 맞췄다. 포백 수비라인엔 김진수, 장현수, 홍정호, 이용이 섰다. 골문은 권순태가 지켰다. 리피 감독은 공격적인 4-3-3 전형으로 맞섰다. 최전방에 왕용포, 우레이, 위다바오가 나섰다.

슈틸리케 감독은 성급하게 공격에 나서지 않고 수비부터 다졌다. 리피 감독은 수비라인을 낮게 유지한 채 공격 기회를 잡으면 과감한 롱볼로 한국의 뒷공간을 파고드는 전술을 펼쳤다. 한국은 경기 초반부터 정면승부를 걸어 온 중국을 상대로 해법을 찾지 못했다.

결국 한국은 전반 34분 중국의 세트피스 상황에서 선제골을 내줬다. 위다바오가 용포의 왼쪽 코너킥을 헤딩슛으로 연결한 것이 권순태가 손을 쓸 수 없는 골문 구석에 꽂혔다. 경기 흐름은 중국 쪽으로 넘어갔다. 한국은 유효슈팅을 한 개도 날리지 못한 채 전반을 마쳤다.

슈틸리케 감독은 후반 이정협을 빼고 장신 공격수 김신욱을 투입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한국은 동점골을 뽑아내기 위해 후반 초반부터 공격을 서둘렀다. 하지만 공격 전개는 매끄럽지 못했다. 김신욱의 머리를 겨냥해 볼을 올려 줬지만 위협적인 장면을 연출하지 못했다. 한국은 중요한 순간 골을 터뜨려 주는 해결사 부재를 실감했다. 경고 누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벤치를 지킨 손흥민의 공백이 컸다.

이날 한국은 스스로 무너졌다. 패스는 매끄럽게 연결되지 못했고 슈팅은 영점을 잃었다. 경기운영 능력에서도 중국에 밀렸다. 투혼도 보이지 않았다. 한국은 정교한 패스를 통한 공격 전개 없이는 러시아월드컵 본선에 가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 줬다.

슈틸리케 감독은 경기 후 “원정에 따라온 팬들에게 죄송하다”며 “중국이 초반부터 강하게 나올 거라 예상했지만, 초반 20분 동안 어려운 경기를 했다. 우리의 경기력이 최고조로 올라왔을 때 실점해서 어렵게 끌고 갔다”고 패인을 설명했다. 이어 “남은 4경기 동안 변화로 해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여기서 승점을 따내지 못했지만 여전히 기회는 있다”고 덧붙였다.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