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롭던 수요일 오후 영국 런던의 명물 빅벤과 템스강을 배경으로 참혹한 테러가 벌어졌다. 지난해 8월과 12월 프랑스 니스와 독일 베를린에서 벌어진 차량 테러가 런던 한복판에서 또다시 재연된 것이다. 불특정 다수를 노린 전형적 ‘소프트 타깃 테러’면서 영국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의회까지 공격 대상으로 삼은 비열한 범행이었다.
22일(현지시간) BBC방송에 따르면 오후 2시40분쯤 웨스트민스터 다리를 건너던 시민과 관광객들 사이로 회색 현대자동차 i40가 시속 약 55㎞로 달려들었다. 시민들은 재빨리 달아났고 일부는 강으로 뛰어들기도 했으나 2명이 목숨을 잃었다. 7명은 중태다. 현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당시 중년의 한국인 관광객 20여명도 인근에 있었다. 이 중 4명이 경상을 당했고 1명은 혼비백산한 인파 사이에서 난간에 머리를 부딪쳐 병원에서 긴급 수술을 받았다.
용의 차량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의사당 울타리와 충돌했다. 차에서 내린 테러범은 흉기를 꺼내 경찰관 키스 팔머(48)에게 휘둘렀다. 15년차 베테랑 경찰관이던 그는 현장에서 사망했다. 모퉁이를 돌아 의사당 내부로 뛰어 들어가던 테러범은 또 다른 경찰이 쏜 총에 맞고 숨졌다.
영국 국적의 테러범은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에 영향을 받은 ‘외로운 늑대’(자생적 테러리스트)로 알려졌다. IS의 선전매체 ‘아마크’는 이날 “공격을 한 사람은 IS의 전사이며, 연합국 국민을 표적으로 삼으라는 지시에 따라 작전을 진행했다”고 주장했다고 AP통신 등이 전했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의회에 출석해 “테러범은 과거 폭력적 성향의 극단주의에 빠져 당국에도 알려진 인물이지만, 최근에는 별 문제가 없어 경찰이나 정보 당국의 감시 대상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테러범이 이용한 차량은 이날 오전 버밍엄에서 출발했고 대여 차량인 것으로 추정된다. 수사 당국은 버밍엄 등 6곳을 급습해 사건과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용의자 7명을 체포해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메이 총리는 TV 연설을 통해 “이번 테러는 자유 민주주의를 겨냥한 공격”이라고 규정했다. 메이는 “웨스트민스터 거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회가 있는 곳으로 세계 곳곳에 울려 퍼지는 자유정신이 각인된 곳”이라며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과 법치를 부정하는 이들이 의회를 표적으로 삼았다. 역겹고 비열한 공격”이라고 비난했다. 영국 정부는 테러 경보를 기존과 같이 두 번째로 높은 ‘심각’ 단계로 유지했다.
1년 전 이날엔 벨기에 브뤼셀 국제공항에서 34명이 사망하고 200여명이 부상한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지난해 8월 프랑스 휴양지 니스와 12월 독일 베를린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벌어진 테러와는 차량을 이용해 무차별적으로 시민들을 사상했다는 점이 닮았다. 테러범이 이들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사건을 계획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크고 작은 테러가 끊이지 않던 유럽은 비교적 안전하다고 믿었던 런던마저 공격받자 공포에 사로잡혔다. 현지 일간 인디펜던트는 “정교한 계획이나 복잡하고 비싼 장비가 아니어도 여러 사람을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우려했다. 이번 사건은 영국에서 2005년 7월 52명이 사망한 자살 폭탄 테러 이후 최악의 테러로 꼽힌다.
현지에선 민주주의를 지켜내겠다는 염원이 담긴 해시태그 ‘우리는 두렵지 않다(We are not afraid)’를 단 글이 SNS상에 쏟아지는 등 테러에 의연하게 대응하자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김미나 기자 mina@kmib.co.kr
런던 심장부도 뚫렸다… 안전지대 없는 유럽
입력 2017-03-23 18:31 수정 2017-03-24 0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