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탕자의 비유에는 왜 ‘어머니’가 없을까

입력 2017-03-24 00:00

‘탕자의 비유’만큼 많이 알려진 성서의 비유가 있을까.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는 탕자를 다시 용서하고 맞아주는 아버지의 모습은 죄인을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다.

이 비유에는 탕자인 동생뿐 아니라, 그의 ‘올바른’ 형도 등장한다. 동생과 달리 규범에 순응하는 형은 동생을 환대하는 아버지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

“보소서! 내가 이 많은 세월 동안 당신을 위하여 노예처럼 일하며 당신의 계명을 넘어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으되, 당신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없애버린 당신의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큰 아들의 대화 속에 담긴 ‘염소 새끼’와 ‘살진 송아지’의 대조는 자신의 결핍을 드러내지만, 스스로는 당시의 규범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자인한다. 1세기의 지중해 세계는 엄격한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통치자인 황제는 ‘제국의 아버지’로 불렸는데, 그 호칭에는 백성에 대한 가부장의 권위와 보호 이미지가 담겨 있었다.

이때 기존의 규범과 질서를 이행하려는 형은 보수적 입장을, 그에 이탈하려는 동생은 진보적 입장을 취한 것이라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아버지는 그들 중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까.

당시의 세계 흐름은 가부장의 엄격한 권위를 보장하고 있었다. 한 예로, 헤롯은 자신의 두 아들이 반란을 도모하는 것으로 오해해 그들을 처형하기까지 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방탕하거나 무례한 아들을 징계하는 것이 당시 사회에서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처럼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큰 권위를 유지하고 행사하고 있었지만, 비유의 아버지는 그 같은 권위를 행사하지 않는다.

비유 속 아버지는 한결같이 유화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고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에 우리가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미 아버지는 유산 상속을 자신의 죽음 뒤로 미루지 아니하고, 작은 아들의 유산 요구에 동의해 줬다. 그리고 이제 자신을 위해 어떠한 특권도 준비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다만 집 안과 밖을 부지런히 넘나들며 두 아들을 끌어안는다. 그들 중 한 아들은 집 밖에서 잃어버린 아들이요 또 다른 아들은 집 안에서 잃어버린 아들이다. 아버지는 부지런히 경계선을 넘나들며 서로의 배척이 아닌 서로의 이해를 통해 가족을 세워 나간다. 그로 인해 ‘방탕한’ 아들과 ‘의로운’ 아들 사이의 간극은 점점 모호해진다.

이 비유는 본래 예수께서 말씀하신 세 개의 잃어버린 비유 시리즈 중 세 번째 비유에 해당된다. 첫 번째 비유에서 ‘남성’ 목자는 집 외부에서 양을 돌보고, 두 번째 비유에서 ‘여성’ 주부는 집 내부에서 가계를 돌본다. 그리고 이 세 번째 비유에서 아버지는 집의 내부와 외부, 안팎의 모든 공간에서 자녀를 돌본다. 그것이 이 비유에 어머니가 없는 이유다. 그는 아버지이면서 어머니였던 것이다.

렘브란트는 탕자의 비유를 배경으로 네 점의 성서화(聖書畵)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이 ‘탕자의 귀향’이다. 작은 아들은 집을 떠날 때만 해도 부잣집 아들답게 화려한 옷을 입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다. 낡은 옷차림에 신발은 다 닳아 버렸고 머리 모양은 죄수와 같다. 탕자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 흐느끼고, 아버지는 그 아들을 두 손으로 감싸 안는다. 그리고 그들의 위로 밝은 빛이 비치고 있다.

이때 화가는 아버지의 왼손을 근육질의 남성적 손으로, 오른손은 부드러운 여성적 손으로 그려냈다. 경계의 양편에서 죄인과 선인, 보수와 진보를 끌어안는 이가 바로 이 ‘어버이’다. 비유는 안과 밖을 어우르며 부지런히 넘나드는 그의 두 발이 우리의 발이 돼야 함과 용서하고 화해하며 치유하고 잔칫상을 베푸는 그의 두 손이 우리의 손이 돼야 함을 말하고 있다. 대립과 반목의 기로에 서 있는 이 민족의 미래를 위해 통합의 길을 그려본다.

박노훈(서울 신촌성결교회 목사)